‘우리 장로님들 수련회에서는 무거운 주제로 하지 마시고 교제 중심으로 하라’고 제가 말씀드려 놓고 또 가장 무거운 주제입니다. 와~~하하하. 김해기장로님 말씀하신 대로 ‘권사님들이 안 계시니까 장로님들이 이렇게 풀이 죽어 있는 같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시고 (하하하) 다니시면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시면 빨리 손 잡아 주셔서 당황하는 분이 없도록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은 세계 기독교의 흐름을 저희가 함께 조망을 해보고, 내년 9월에 송도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 대회를 제가 호스트 하면서 덩달아 우리 교회가 중심이 돼서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장로님들이 먼저 아셔야 하고, 외부에서 앞으로 계속해서 질문을 많이 받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장로님들은 '명확하게 무엇이다'라는 설명을 하실수 있어야 하고, 일부 한국 교회의 이슈가 생기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공격하는 이런 부분을 잘 대비를 하시고 설명을 잘 하시기 위해서라도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창립될 때 하 목사님이 목회 철학 다섯 가지를 세우셨습니다.
온누리 신문 우측에 보면 이 5가지가 성경 중심, 복음 중심, 선교 중심, 긍휼을 베푸는 교회, 그리스도의 문화를 심는 교회. 다 당연한 말씀을 같지만 저는 이 복음주의, 세계 복음주의 흐름을 다시 한번 제가 살펴보면서 복음주의 교회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설명하신 목회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다 복음주의적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거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누리교회가 지난 38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은혜의 기원은 이 다섯 가지의 중심이 되는 목회 철학에 근거하여 목회가 이루어졌고, 이 5가지 철학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다섯 가지 키워드입니다.
성경 중심이라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을 믿는 그런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 고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리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복음, 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중심으로 한다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정치 제도나 질서를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온누리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라고 우리 장로님들께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좋은교회이다. 이렇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장로님들은 이렇게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주의 장로교회입니다.’ 복음주의 장로교회입니다. 이렇게 두 단어로 대답하시면 명확한 대답입니다. 그러면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장로교회도 있을 수 있습니까? 예, 분명히 있습니다. 자유주의적인 장로교회, 근본주의적인 장로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이러한 현재 우리 한국 교회, 세계 교회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소위 교단 denomination의 이름들의 출발은 교리적인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현대에 와서는 전부 정치적 어떤 질서의 부분일 뿐입니다. 그래서 쉽게 교리적 차이 때문에 교파가 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죠. 거버넌스 시스템, 교회 정치 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회중교회일 경우에는 침례 교회도 있고요. 대의정치일 경우에는 장로교회, 그 다음에 강력한 목회자 중심의 경우에는 감리교회 입니다. 그래서 감독이 있죠. 그래서 정치 질서의 차원에서의 구분이지, 교리적 차이의 구분은 도리어 복음주의냐?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냐? 이런 구분인 거죠.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서로 혼용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적인 장로교회도 있고, 자유주의적인 감리교도 있고, 자유주의적인 침례교회도 있고, 복음적인 장로교회고 있고, 복음적인 감리교회도 있고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감리교회도 있고, 근본적인 침례교회도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라는 큰 흐름. 이것은 성경의 영감을 믿는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가? 그리고 세 번째는 선교적인가? 선교에 얼마나 헌신적인가?에 따라서 복음적인가? 복음적이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 순서대로 성경 중심의 교회는 반드시 복음 중심이 되고, 복음 중심일 때는 또 반드시 선교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복음 중심이라고 하는데 선교와는 친하지 않는다면 복음 중심이 아닙니다. 앞에 성경 중심, 복음 중심의 철학은 반드시 세 번째 선교 중심으로 이어지고, 선교적일 때는 긍휼을 베풀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지 않으면서 영혼만 돌본다라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떡과 복음은 어느 것이냐?가 아니라 항상 함께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선교중심적일 때는 반드시 긍휼을 베풀게 돼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연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 결국은 긍휼만 베풀어서는 복음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그 시대에 리더십들을 깨우고, 정치 사회 질서 문화적 창조를 통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결국은 궁극적으로 선교 사역에 중요한 일이 되는 거죠. 수동적으로 약자만 믿는 게 아니라 강자를 변화시켜서 세상에 더 영향력 있게 바뀌는 그의 문화를 변형시키는 이것이 복음주의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온누리 신문에 나오는 하 목사님이 창립 때 만들어 놓으신 이 5가지 철학이 저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복음주의이다. 이 5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면 복음주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제가 이제 강의에서 말씀드릴 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온누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라고 어느분이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온누리교회는 복음주의적 장로교회다. 이렇게 대답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온누리교회가 감리교회 인줄 알고 계신분은 안계시지죠? 하하하. 온누리교회는 복음주의적 장로교회이다.
그런데 복음주의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타당한가? 혹시 여러분 멀리서 안 보이면 교재를 보시면 그대로 나와 있으니까 교제를 보시면 됩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복음주의 (Evangelicalism)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가? 왜냐하면 이 복음 뒤에 '~주의(~ism)' 무슨 주의를 붙이는 것은 어떤 규정을 짓는 수준으로 약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꼭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비슷한 제도로 칼뱅주의라고 할 때 칼뱅이 돌아가시기 한 6개월 전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그 칼뱅에 대한 책을 보면서 알았는데, 아주 노발 대발하시면서 제발 그러지 마라. 왜 내 이름에 주의를 붙이고 나라고 규정하느냐? 라는 말도 했지만,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칼뱅주의가 표방하는 그런 성경관, 세계관 그것으로 규정짓고 무엇인가 규정돼야 되는데 역시 그것은 그 일밖에 없다. 후대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형성이 되어 온 것처럼 복음을 위해서라도 할 수 없는 왜냐하면 복음이 아닌 것들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복음을 보호하고, 복음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불가피하다. 장로교 주의라는 말이 없지만 복음주의는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운동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통합해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냐? 둘 다 가능하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시대에 따라서 언제나 우리의 이 비성경적인 요소에 대항 혹은 저항만 형성이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적 상황과 문제에 적용해 가면서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키워드가 나옵니다. 하나는 대항이고 두 번째는 적용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사도들에 의해서 이 복음이 전파될 때부터 사도들 시대부터 복음적이지 않은 예수님께서 전하시지 않는 복음을 복음처럼 가르친 일들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이건 복음이 아니다라고 저항하면서 복음주의가 형성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시대마다 그 교회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해 가면서 복음주의 생겨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보면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의 저주를 선포하는 그러한 모습처럼 그 당시에 다른 복음은 율법주의였죠. 여전히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복음주의에 저항한 다른 복음이 또 율법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었죠.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플라톤의 이원론의 철학에 사로잡혀서 영혼을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이다. 그래서 이 플라톤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사 복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게 되죠. 육은 악한 것이니까.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요한일서가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을 지키기 위해 쓰여진 서신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에 대항하는 복음서고,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에 대항하면서 쓴 복음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다' 라고하죠. 신약 자체가 저항을 하면서 복음을 명확하게 하고, 또 교회 역사적으로도 여러 이단들이 출연할 때마다 그것에 저항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또 한 가지 사도 바울의 사도들을 보면 여러 교회들이 일어난 고린도 교회를 비롯해서 여러 교회에 일어난 문제들에 대하여 처방책을 내놓으면서 복음적 시각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건가?라고 하면서 복음주의의 기원이 형성이 된 겁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이제 루터와 칼뱅을 비교해 보면 마틴 루터는 저항자로서의 복음주의자인거죠. 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에 대항하면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의’의 발견을 통해서 교회가 복음을 가리었던 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그는 종교를 창시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로마 카톨릭을 분리시키려고 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순수한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밝히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순수한 복음이 드러나면 카톨릭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까 루터를 제거하려고 엄청난 핍박과 살해 위협, 죽이려고 했죠. 그러나 복음의 순수성이 이제 확산되면서 루터의 저항은 종교 개혁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프로테스탄트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죠. 저항자들이 프로테스탄트입니다. 개신교라기 보다는 저항자들 입니다.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언제나 초대교회부터 저항해 왔습니다. 바울이 그랬고 그 다음에 또 루터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한계는 그가 수도원 출신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문화변혁적인 요소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심리주의적인 구원적인 그런 이원론적인 걸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현재의 루터교를 보면 카톨릭 교리적 순수성은 개혁을 했지만 문화 변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카톨릭적인 전통 속에 순수한 교리만 바꾸는데 같혀버린 그러한 형국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저항으로서의 복음주의를 표방했지만 적용적인 면에서는 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뱅이 등장을 통해서 그보다 몇십 년 후에 활동한 칼뱅이 루터가 밝혀놓은 순수한 유대의 복음을 이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칼뱅의 여러 논문들 신학적 체계에는 이원론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고 계시고 이것이 일반은총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타락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은 구속을 그 영역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이게 영역 조건과 일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든 자원을 통해서 우리는 문화 변혁을 추구해야 된다. 그래서 칼뱅을 통해서 인문학, 과학 이런 것들이 많이 발전하고 유럽의 과학기술 문명의 이면을 보면 다 프랑스의 종교개혁 후에 위그노들의 흩어진 핍박 속에 흩어진 위구노들의 후예가 유럽의 과학기술 문명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루터는 저항적 복음주의자인 반면, 칼뱅은 적용주의적 복음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이 합쳐지면 현재가 역사적으로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또 한편으로는 적용하는 일 그래서 우리는 루터의 저항과 칼뱅의 적용을 함께 우리가 품어야 온전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볼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각 시대별로 나타난 복음주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제가 율법주의에 대항하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에 넘어가고,
16세기에도 로마 카톨릭의 비 성격적인 요소에 대항해서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제 우리 프로테스탄트 내에도 개신교 내에도 18세기 넘어서면서 우리 기독교의 영향력을 확대되면서 각 나라들이 이제 카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를 국교화하는 나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18세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18세기에 여러 국교 세력이 많이 일어났는데 국교화 되면서 또 카톨릭처럼 비슷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또 저항하여 일어난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라든지 또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라든지 이런 분들이 다 국교화된 개신교회에서 비성경적인 요소에 저항하면서 참된 교회 복음적 교회가 되려고 애를쓰고 그래서 1차 대각성 운동도, 2차 대각성 운동도 Great Awakening이라는 그건 죄인들을 깨우는 의미도 있지만, 기존 교회들이 국교화된 것 같은 교회 속에서 비성경적인 요소를 정확하게 깨기위한 그러한 운동이다 라고 보면 됩니다. 네덜란드에 가 보면 이제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당시에 네덜란드의 국가 교회가 있었는데, 국가 교회가 형성될 만큼 개신교가 유럽의 엄청난 영향력으로 칼뱅의 영향력이 유럽을 휩쓸었다고 볼 수가 있죠. 네덜란드의 국가 교회 밑에서 이제 아브라함 카이퍼가 한 지역교회에서 목회하게 되는데 교단에서 내려오는 공문를 보니까 이게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거부하기 시작하는데 그런 교회들이 늘어나면서 연합을 이루게 되면서 이것이 네덜란드 국가 교회 내에 형성된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이 중 하나가 그 교회들의 이름을 애통하는 사람들 그래서 톨레야지라는 이름을 쓴 겁니다. 바로 똘레야지는 애통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국가 교회의 현실이 너무 복음에서 돌아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슬퍼한다 한 거예요. 처음부터 교단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따라오지 않는 그러한 모습에 대하여 결국은 강하게 나오면서 분리가 되죠. 그래서 분리된 교단이 네덜란드 계속 교단이라는 교단이 형성이 되고 네덜란드 개혁보다는 이 국가 교회가 비성경적인 것에 대하여 휩쓸려 갈 때, 거기에 저항을 한 사람들이죠. 저항 하되 복음적으로 저항한 거예요. '너희들은 틀렸으니까 우리는 나간다'가 아니라 '슬퍼한다' '애통한다' 그랬는데, 너희들은 끝내 이렇게 이제 몰아내는 거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 교단이 갈린 것이 아니고 씨앗 교단입니다. 네덜란드 개혁교단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교단이 됩니다. 그처럼 미국에 있는 많은 교회들에게도, 복음주의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19세기 초에도 20세기 초에까지 이게 계속 영향력이 개신교가 주류가 된 나라에서 일어나는 복음주의 운동들이 계속 계속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 영국 국교회가 국교가 성공회 아닙니까? 그래서 성공회가 이 복음으로부터 점점점 멀어져 가고 있을 때 성공회 내의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이 형성이 됐습니다. 항상 이 국가교회의 정통적, 전통적인 질서 안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가만히 있지 못해요. '복음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말씀이 시사하는 것이 복음주의는 가만히 그냥 질서대로 순응하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비성경적인 요소를 보면 저항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저항해 갑니다. 그래서 성공회 내에 복음주의자들의 그룹이 형성 되어 갑니다. 그 중심 되는 분들이 존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 존스 두 분이었어요. 한 분은 올 소울즈 교회 담임목사셨고, 한분은 웨스트민스터 채플 담임이셨지요. 두 분이 처음에는 성공회 복음주의자 역할을 같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술적인 건지 어떤 철학적인 건지 모르겠지만은 마틴 로이드 존스는 더 이상 이제 우리는 같이 할 수 없다. 이제는 안되겠다. 그래서 어느 해 복음주의자들의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합니다. 폭탄선언을 합니다. 우리는 나가야 한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존 스토트가 가장 많이 놀랐지요. 아니다. 우리는 성공회에 있어야 된다. 그래서 결국은 마틴 로이드 존스만 분리주의자가 되어 버렸어요. 성공회에는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의 모임, 저는 지금 시점에서 그 당시에 만일 로이드 존스가 주창한 대로 성공회에 대해서 복음주의 자들이 나와서 성공회 복음주의 교단이 새로 생겼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지금의 영국 보다는 훨씬 나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사 책을 보면서 그래도 존 스토트가 거장이시구나! 영국에는 존 스토트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최근에 영국의 흐름을 보면 온전치 못한 것이 아니었나? 그때 성공회를 지키는 것이 요즘 찰스 3세 황제 대관식도 보고, 그러면서 과연 영국 사회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볼 때는, 최근 제가 잘 아는 장로님들께 나누었지만, 한국의 최종상 선교사님이 저에게 보낸 메일을 보면 지난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신문을 업데이트서 보내주셨는데요. 수업 시간에 수업 선생님이 이 여학생 안에서 아주 성적을 잘 받았나 봐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좋아서 여학생을 칭찬했나봐요. 우리 학생들 잘했다. 학생들이 응 그래서 트랜스젠더 학생이 선생님을 고소했어요. 나의 성 정체성을 업신 여기고 모욕을 줬다. 그래서 그게 문제가 돼 결국 교육부 장관이 이 선생을 면직시킨 트랜스 젠더는 남자 간의 말씀이 왜 거기에 있어, 어피어런스는 완전히 여성인데 주장만 해도 남자라고 하면 남자라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 말을 아이들은 자기의 성을 여자로 주장하는 남자와 여자로 주장하는 남자를 선생님이 다 파악하고 있어야 돼요. 그것도 수시로 바뀔수 것인데... 그런 사회가 개신교 교단 중의 하나인 성공회가 국교인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성공회에는 그런 법을 만드는 지도자에게 대관식에서 왕관을 씌어주는 일 밖에 영향력은 전혀 없다면 저는 젊어서 그런지 그때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성공회를 박차고 나와서 도전하면서 복음으로 하나 돼가지고 강력하게 사회가 이렇게 세속화되는 것을 막았었다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한국 교회가 나오는 것처럼 차별금지법 절대 안 된다. 사회적 성 절대 안 된다. 목소리를 냈으면 영국은 이렇게 되지 않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저는 역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내에서도 성공회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모임들이 있었고 그런 논란들이 있었다는 거죠. 이런 흐름들이 계속 19세기에 넘어오면 아주 이제 첨예하게 등장하게 되는 게 이제 성경을 공격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자유주의라고 부르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비평학 이렇게 성서 비평학 이렇게 말할 수가 있고, 성경을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거죠. 권위있는 책,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유일한 거룩한 책이 아니라 A BOOK 여러책 중에 하나의 책으로, 인간이 최고로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비평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역사 비평 또는 자료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 수많은 비평의 종류를 가지고 성경을 비평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겁니다. 그중에 일부는 유익이 되는 것도 있어요. 어떤 문화 양식에 따라서 비평적으로 보는 그런 시각은 일부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역사 비평 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후대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미워할거라고 비하하기 위해서 역사를 다시 쓴 거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책이 되어 버린 거죠. 19세기에 비평학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유럽과 북미 대륙을 휩쓸기 시작하죠. 그 흐름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이제 성서 비평학을 중심으로 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림으로써 결국 복음을 잃어버리게 하고, 그 결과가 결코 선교도 하지 않게 되는 이 흐름을 자유주의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흐름들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저항하게 됩니다. 이거는 복음이 아니다. 이거는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라고 저항하면서 미국에서 복음적으로 저항을 하는데, 저항한 나머지 연구 자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문화적인 그러한 변혁 시각을 다 함께 버리는 흐름이 나타나는 것을 근본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Fundamentalism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하는데, 문화적으로 비판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는 거예요. 구약으로 자꾸 돌아가요. 그리고 적극적인 문화 변혁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점점 고립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충만하라고 하는 이 문화 명령,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선교 명령, 이런 부분을 전부 잃어버리면서 근본주의 형성이 이런 근본주의는 율법주의하고 아주 잘 맞닥뜨려서 우리나라에서 근본주의 율법주의적 교회가 아닌 이 시대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입니다. 미국의 20세기 초반에 1920년대 40년대까지 미국에 일어났던 근본주의 흐름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와서 한국교회 초기에 이제 매우 율법주의적인 근본주의 신앙이 한국의 토대를 이루게 된 곳이 많습니다. 뭐 그걸 예를 들자면 한이 없는데요. 이것은 미국에 있었던 청교도들의 어두운 면하고도 일치합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 왔지만 청교도들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고, 징계를 받고 그 당시에 주류 선교라고 하면 먼 거리로 이동 못하게 했어요. 청교도들이 아이에게 유아세레를 한다고 몇 십km 기차를 타고 왔는데 그 여자 성도를 징계한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적으로 철저하게 한다는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흐름인데 오히려 이 아주 율법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그런 형성된 그리고 이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문제에 관심 없다. 어차피 세상은 알 거고 그러한 시각에서 사회로부터 점점 고립돼 가는 근본주의가 미국에서도 형성이 됐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형성이 됐어요. 그래서 부산의 어느 신학교의 교장이었던 목사님이 이게 20세기 초에 일어나 1930년대에 일어난 것입니다. 선교사를 배웅하다가 배가 들어오는 날이 주일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일요일이었던 거예요. 정확하게 말하면은 그러니까 선교사를 배웅하고 왔는데 너무 거리가 멀다 보니까 예배를 참석하지 못해서 학장직에서 면직했어요. 선교사 배웅하고 왔는데.... 그 정도로 엄격했는데 무엇을 위한 엄격함이냐? 이런 부분에서 이제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을 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흐름에 대하여도 이건 아니다. 자유주의 소위 성서 비평이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성경 그냥 QT만 할 수는 없다. 연구해야 된다. 또 우리가 사회 문화적으로부터 이탈할 수는 없다. 누구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되고 또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대안을 제시해야 된다라는 이러한 시각에서 자손들이 일어난 이것이 제가 여기 Carl Henry이라는 이름하고 하루 주장을 어긴다라는 두 분이 세운 훌러 신학교가 이제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세워진 학교로서 미국의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학교가 됩니다. 그때는 이제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붙였는데 지금은 복음주의 그러면 그때의 신복음주의가 지금의 복음주의라고 말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Okenka라는 분이 또 보스톤에서 모시고 보스톤의 신학교이고요.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이제 등장하게 되면서 크리스차니티 투데이가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센터가 되죠. 빌리그레함 전도협회와 크리스챤 투데이라고 하는 기관이 복음지를 대변하게 됩니다. 하 목사님께서 이제 두란노서원을 세운 것이 복음주의 교회들을 위한 신학적, 목회적, 성도들을 위한 복음주의 영성을 가진 자료들을 출판하는게 크리스챤 투데이의 어떤 비전과 일맥상통 합니다. 문서를 통해 끊임없이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을 전파한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복음주의자는 언제나 복음의 순결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한 편에 현대 자유주의 신학, 철학들과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의 문제와 문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변화해 가면서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복음주의라고 할 때는 무엇을 강조하는가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에 네 가지 핵심 요소가 있는데 를 첫 번째, 회심주의 (Conversionism), 회개와 구원을 강조한다.
두 번째, 성경주의(Biblicism),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된 말씀임을 강조하고,
세 번째, 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합니다.
네 번째는 행동주의(Activism), 전도와 선교 그리고 사회 봉사 나아가서 사회 정의에까지 함께 참여하는 이것이 복음주의의 모습입니다. 앞서 근본주의 교회로 흐를 때, 그 당시에 세계 대공황이라든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대하여 침묵하는 교회들을 보면서 이제 여러 책들이 나와서 '근본주의자들의 불편한 양심', '사회적 양심', 이런 책들이 나오면서 복음주의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믿지만 이 세상 속에 책임 있는 사회적 참여를 해야 된다라는 이 양 축을 지켰던 것이 복음주의입니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 이제 복음주의를 역사적으로 정리해 보면서 6가지 확신이 두드러진다. 이 칼 헨리(Carl Henry)에서부터 시작해서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그 다음에 현재 살아계신 알리스트 맥클라스 (Alister McGrath) 성공회 사제이고 신학자이지요. 복음주의의 6가지 지배적인 확신을 정리합니다. 첫째는 언제나 그랬듯이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
세 번째, 성령의 주되 심. 이 부분이 이제 오순절, 그 다음까지를 포함할 수 있는 복음주의의 넓은 면을 보여주는 거죠. 장로교 내에서도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합동측과 고신측은 성령의 은사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지만, 교리적으로 보면 그래서 이 성령론이 상당히 폐쇄적이고 은사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이제 복음주의가 되지 못하고 근본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이 결국 이 성령의 주되심이 인정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교단하고 교류하지 않고, 그런데 지금 전 세계 복음주의로 볼 때 남반구에 많은 교회들이 오순절 교회들, 아프리카 같은 데는 거의 오순절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은 다 복음주의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지요. 그렇죠, 성령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도 복음주의 중에 삼위 일체 성령님이,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성령론에 대해서 우리는 오순절주의를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와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이게 복음주의의 특징입니다.
네번째, 오순절 복음주의도 인격적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섯째,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언제나 강조하고,
여섯 번째가 이제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함께 연합하는 것을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초교파적으로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성결교, 오순절의 복음주의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초교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온누리교회에도 목회자들이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 다 있지 않습니까? 하 목사님의 철학은 복음주의 장로교회이었기 때문에 장로교라는 전통을 정치적 질서로는 장로교 정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실제 교회의 양육 콘텐츠나 목회는 복음주의적으로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초교파적인 연합이 가능했던 거예요. 어느 교단 신학교 출신이 와도 다 하나로 녹아들 수 있던 것은 복음주의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하용조 목사님, 옥한흠 목사님, 홍정길 목사님, 이동원 목사님을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들 자신이 그렇게 내세운 게 아니에요. 주변분들이 그렇게 부르는 거죠. 그분들을 부를 때 ‘강남에 내 친구’ 이렇게 해도 할 수 있는데 왜 복음주의이라고 부르냐? 침례교, 장로교, 장로교회도 여러 교파가 있지만, 함께 복음 전도와 선교에서 연합했기 때문에 그들을 복음주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복음주의 교회 전통이라는 것이 인식돼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특정 교파나 교리, 침례교는 직계 제도를 하죠. 분파를 인정하지 않죠. 그러나 포용하고 싸우지 않는거죠? 또 어떤 교단에는 여성한테 안수를 주기도 하고, 안 주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싸우지 않는 거예요. 지금 미국에서도 여성 목회 안수 주면 되냐? 안 되냐? 하고 아직도 싸우는 교회가 있어요. 침례 교단 중에서. 그래서 세들백교회(릭 웨렌목사)는 여성 안수를 주는데 교단에서는 왜 안수를 주냐? 그래서 징계하고 해서 세들백교회에서는 징계해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침례 교회 전체보다 세들백교회의 영향이 더 큰 구조이다 보니까 그냥 싸우는 거예요. 징계를 해라. 나는 나가겠다. 그러니까 세들백이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거예요? 복음주의를 표방하고, 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침례 교단은 침례교의 교단이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세들백 교회는 우리는 침례 교단이지만, 복음적 침례 교단을 하고 싶다라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죠? 그러니까 복음주의는 언제나 감리교도, 장로교도, 침례교도, 초교파적인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데 앞에 ~주의를 빼면 개교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하 목사님께서 이끌어 오신 온누리 교회의 전통 속에 복음주의 교회의 전통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염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근데 복음주의에 매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주의에 결여된 문화 변혁의 비전입니다. 근본주의는 언제나 문화 변혁에 어렵습니다. 주의 우리나라에도 근본주의적인 교회들이 코로나 때 많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분들은 예배에서 시크린을 거부합니다. 사실 미디어 영상이 나가는 것, 유튜브로 나가는 것, 어떻게 유튜브로 예배드릴 수 있는가? 이런 코로나 상황에서 문화적 요소를 배제하는 교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정부에서 시행하는 방역의 어떤 룰도 어기고, 그냥 모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가지고 성도들이 우왕좌왕하고, 그런 부분이 대부분 이 문화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근본주의 교회에서 많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자유주의는 뭐냐? 하면 문화적인 요소는 있지만, 복음적인 요소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자유주의 쪽에는 지적으로는 아주 활발합니다. 아주 책도 잘 쓰고 글도 잘 써요. 그런데 복음주의 요소가 빠져버리는 거죠. 그런데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 결연된 문화 변혁의 비전도 있으면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이 학문적 근면성 이런 것도 함께하고 있고, 그 다음에 교파적 독선이나 분파주의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데 헌신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한 네트워크가 가능하다. 이게 복음주의에 매력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좀 더 시대적으로 줌 인해서 1945년 이후에 복음주의 운동이 세계적으로 부각된 시점이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무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이 여러 전쟁으로 인해서 엄청난 피해 속에 있을 때, 유럽 전체가 난민이라고 볼 만큼 어려웠을 때, 유럽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선 미국의 성도들이 복음주의자들이었어요. 그때 대표적으로 나섰던 단체가 YFC, Youth For Christ라는 10대 선교회죠. 그 단체가 가장 앞서서 유럽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먼저 분유를 제공한 거죠.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분유를 베풀면서 복음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 왔던 YFC 전도자 밥 피어스(Bob Pierce)가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시작했죠. 월드 비전도 복음주의자가 세운 구제 기관인 겁니다.
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YFC의 복음전도자였죠. 그래서 빌리그리함 전도 협회를 이렇게 YFC에서 나와서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를 해서 1980년대까지 전 세계를 순회합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남미, 유럽 할 것 없이 일년에 몇 차례씩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도 집회를 했죠.
우리나라에서 1973년 서울대회에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모였죠. 그런데 이제 조금 크리티컬하게 이 계획을 보면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가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이 대회를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교회들이 성장했다라고 볼 수 있는 면이 있지만, 그러나 이 대회 때문에 전체 교회가 갑자기 성장이 일어났다라고 볼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복음주의 교회들이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이 가능했다라고 봐야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를 보면 서울대회에 가장 많이 모인 대회라고 그러는데 역사상 가장 많이 모이는 것은 빌리그래함 전도 대회가 가장 준비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1964년부터 그 당시 이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님이 ‘200만 성도가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자’라는 구호로 1964년도에 대학 생활을 보내신 장로님들을 기억하실 지 모르겠어요. 1965년을 ‘복음화 운동의 해’로 정해서 초교파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우리나라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김활란 박사님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로 공과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적어도 후반기에 그런 문제가 있을지라도, 이분이 끼친 우리나라의 복음 운동에 대한 공은 지대합니다. 제가 책을 보니까 어떤 목사님보다도 더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역사적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화여대 교목실장을 따로 만났을 때, 제가 이 얘기를 했더니 그 얘기를 꼭 좀 와서 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다음 주에 이화여대에 가서 이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하하하. 너무 공격만 받아서 상처를 입었는데 엄청난 반전 그 당시에 세워진 많은 단체들 CCC를 비롯해서 Navigator, IVF, JOY 선교회등 하 목사님도 CCC에서 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시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러한 선교 단체의 힘을 모았기 때문에 그 집회가 가능한 거지, 빌리그래함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신령한 선지자가 오시니까 다시 보자.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어떤 세계의 다른 나라보다도 가장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이 일어났는데 이미 김활란 박사님을 비롯한 이런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복음적 영성 이 밑바탕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 3일에 상암 경기장에서 했습니다마는 저는 복음주의적 저항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제 복음주의 세계 운동이 이제 빌리그래함 전도협회가 하여튼 전 세계 각국의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전 세계 복음주의 네트웍을 빌리그래함 전도 협회가 만들었다라고도 볼 수가 있어요. 그 정도로 전 세계적인 네트웍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단체가 되기 위한 점등 그런 면에서는 정말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벌써 끝날 것 같은데 이제 시작인가? 하하하. 여태까지 로잔에 대해서 좀 설명한 줄 알았는데 이 로잔 운동은 이제 시작하니까 죄송합니다. 몇 분에 끝내야 하지요? 아직 시간이 좀 있습니다. 그러면 잠시 이렇게 스트레칭을 좀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질문하실 내용이라도 있으실까요?
자 그러면 이제 로잔 운동에 대해서 다시 역사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이런 복음주의 흐름이 있었는데 로잔 운동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했는가? 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잔 운동이란? ‘복음주의’ 교회들의 ‘세계 복음화’ 운동이다.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함께한 '세계 복음화' 운동이다. 이렇게 규정을 Define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냥 제가 로잔 운동이다 라고 설명할 때 복음주의적 세계복음화 운동이다 그러면 그냥 앞에 다 흘려버리는 거죠. 복음주의라고 할 때는 역사적으로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한편으로는 근본주의의 수정을 잡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 비성경적인 요소에 저항하고 또 시대적 문제에 적용하는 그러니까 좌우 측에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또 앞뒤는 저항과 개혁 이 네 가지 울타리 속에서 균형을 잡아 오는 것이 복음주의인데 그것이 세계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복음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 로잔 운동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배경은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에딘버러(스코틀랜드)에서 1910년에 세계 복음화 선교사 대회가 열립니다. 그때 세계 복음화에 소망을 가진 지도자들이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라는 주제로 모였는데 'In this Generation'이라는 말 자체에 약간 교만하게 느껴지죠? 이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끝내자. 내 작품으로,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그 당시에 복음화가 끝날 것으로 여길 정도로 소위 서구 선교사들이 다 자신만만했습니다. 이때 모인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서구권 선교사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몇 분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때 윤치호 선생님이 참석했다고 하고, 우리나라 교회 지도자 몇 분이 참석을 했고, 거의 다 웨스턴 선교사님들이 참여해서 ‘이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끝내자’. 그 당시에 선교의 개념은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가는게 선교라고 착각할 정도로 선교가 서구 중심의, 백인 중심의 선교였어요. 그때의 존 모트(John R. Mott) 선교사를 중심으로 전 세계 선교사들이 다 모인 첫 번째 유일한 대회 역사적인 날이죠. 그래서 2010년에도 에딘버러 100주년 기념 대회도 있고 그러는데, 이 대회가 이제 1914년부터 시작을 해서 세계 교회 연합으로 발전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라는 그러한 단체가 발족이 됩니다. 그러니까 WCC라는 전 세계의 교회 연합이 발족하게 된 계기가 뭐냐? 하면 1910년 에디버러 세계선교사대회 때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거구나! 라는 걸 처음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모였던 걸 계기로 해서 세계 교회의 연합으로 발전이 되는 선교사들은 우리가 교회에 들어가지라 우리 선교 위에서 모였다. 그래서 IMC라는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이라는 조직으로 독립해서 발전을 시작 합니다.
전 세계의 개신교 연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게 두 기관이 있고 하나는 IMC라는 선교사들의 연합이 있고, 또 하나는 WCC라는 세계교회연합이 시작 된 겁니다. 그래서 1950년대까지 50년대,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WCC는 그렇게 과격화되거나 이념적으로 복음에서 많이 이탈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 기독교회들이 모인 대표들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의 그러한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면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이 양측의 안정 속에서 WCC가 자유주의 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급속도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뒤에 뒷부분에 나와 있지만 신학적으로 변질이 되죠. 그런데 그때 레슬리 뉴비긴이라는 WCC의 선교분과 총무 그리고 IMC의 의장이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인도 선교사였던 분이 둘을 통합하게 됩니다. 1961년도에 유대인이 총회에서 또 이들은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어야 된다. 선교는 선교단체들이 하는게 아니라 교회가 하는 거다. 그런 의도로 이 둘을 통합합니다. IMC와 WCC 그래서 IMC가 CWME이라는 WCC의 산하 선교와 종교 분과위원회로 이제 바뀌게 됩니다. 그때 급격하게 변질된 것이 이제 1968년도입니다.
1966년도 베를린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 주최로 세계 종교회의가 모이게 되는데 그것은 WCC의 선교 신학이 변질되는 것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서 이제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가 전부 교회를 별도로 그러니까 WCC는 상당히 뭐라 그럴까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1971년도에 결정을 하니까 우리가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이 함께 모여야 된다.
그래서 1971년도에 그렇게 된 이유가 1968년도에 웁살라 대회가 결정적이었는데요. 이때 선교를 어떻게 정의하냐? 하면 ‘인간화 (Humanization)’ 이렇게 정의를 하죠. 또 ‘정치적 해방’으로 선교를 정의하면서 자유 신학이 WCC를 선교 신학을 거의 장악했다고 볼 수가 있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WCC 독일 대표였던 피터 베이어 하우스(Peter Beyerhaus)라는 우리나라에도 몇 년 전에 왔죠. CEO 포럼하고 같이 소셜 쉐더 거기에 대해서 비판하는 강의도 와서 해줬는데요. 피터 베이어 하우스가 그때 독일교회의 대표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면서 선교가 구속적 관점이 아닌 인본주의 관점으로 대체된 것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1970년대 프랑크푸르트 선언문을 독자적으로 독일 교회에서 발표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제 존 스토트가 영국의 대표였죠. 존 스토트가 영국의 WCC 대표로 이때만 해도 함께 이제 참여한 거예요. 그래서 영국 대표였던 존 스토트 같은 분이 그때 일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씁니다. 웁살라 선교사 대회였지요. 여기 내용을 보시면 ‘IMC가 다시 WCC의 품으로 들어갈 때 선교가 WCC와 그 소속 교회들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선교는 사회-정치적 단어로 재해석되어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결과 1910년 에딘버러의 꿈은 외면당했고, 결국에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1910년도의 꿈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게 존 스토트의 이야기입니다.
좀 전에 1968년도 웁살라 대회를 분기점으로 라고 했죠. 또 이 통합을 주도했던 레슬리 뉴비긴은 또 이런 말을 했어요. 자서전에서 한 말을 제가 들어보겠습니다. "뉴비긴은 IMC와 WCC가 통합된 이후에도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였으니 세속화 사상의 물결과 호켄다이크의 선교학(교회를 철저히 비신화 해야하며 기독교는 세속적인 운동이라는 것이 교회를 이해하는 토대라는 주장)이 WCC의 선교가 교회를 배척하는 것으로 오도되면서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이후 WCC의 다원주의 경향과 타문화선교 약화에 대하여 비판적이 된다."
이게 레슬리 뉴비긴의 자서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1968년도 스웨덴 웁살라 시티입니다. ‘웁살라 대회는 여러 면에서 나를 산산이 부서버린 모임이었다. 전체 집회는 온통 경제적 불의와 인종적 불의의 문제로 채색돼 있습니다. 분위기는 분노로 가득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지옥의 구렁텅이 위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그룹이 그처럼 쉽게 세뇌 당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몰려왔다’<아직도 끊나지 않을 길> (레슬리 뉴비긴). 엄청난 좌절과 죄책감을 레슬리 뉴비긴이 느끼게 됩니다. IMC라는 선교사 단체를 WCC와 통합함으로써 선교사 대회에 1910년대에 에딘버러의 꿈들은 사라져버렸다고 그랬고, 여러 면에서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어미 범위에서 이제 자유주의 신학적 관점으로 선교를 ‘신학적 인종 차별’이라고 묘사하는 성직자에게 ‘신학적 간음을 조심하라’ 이런 충고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이 대회에 참여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 가지고 이것이 1960년대 말까지의 흐름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배경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1차적으로 결론적으로 1973년도 이제 CWME 단독 대회는 WCC의 전도선교 분과입니다. 거기에서 ‘오늘의 구원, Salvation Today’라고 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사회적 해방 운동이고, 정치 투쟁이고, 노조 운동이고 이런 거예요. 이런 거를 이제 ‘오늘의 구원’이라고 그러니까 1968년도에 웁살라 대회에서 돌아간 거고, 1973년도에는 이제 완전히 이제 신앙이 사회학으로 변질 되고 선교가 인간화의 중심으로 뚫은 겁니다.
그러니까 1968년도에 있었던 웁살라 대회, 1973년도에 CWMA 대회에서 ‘오늘의 구원’이라는 이 두 대회가 복음주의자들의 분노 내지는 저항 그리고 일종의 봉기화 같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1971년도에 이 기간 동안에 이제 빌리 그레함이 복음주의자들이 왜 그래야 되냐? 라고 주장을 했을 때, 1971년도에는 다들 꼭 그래야 되냐? 라고 했는데, 왜 오히려 돈도 많이 들지 오늘날에도 모이는 게 몇 천 명 모이는 게 어려운데 그러니까 1910년도에 몇 천 명이 모이는 거는 진짜 기적 같은 일이에요. 몇 십일이 걸려서 가야 되니까.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된 때도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그 당시에 몇 천 명이 왜 모여야 되냐? 라는 그러한 거를 극복하면서 빌리 그래함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집회를 해 봤으니까. 무엇을 해야 된다. 그러면 1968년도와 1971년도에 이 3년 동안에 이 WCC 대회의 선교, 특별히 선교를 인간화적인 사회 관점에서 정의한 것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들이 이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거다.
그래서 네 이걸 이제 보고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드린 것을 요약한 차트인데요. 교재에는 없습니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이게 역사적 아주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위에는 IMC, 즉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로 해서 쭉 흘러가고, 중간에 이제 WCC의 조직으로 발전이 된 겁니다. 그래서 1948년도에 암스텔담에서 이제 본격적인 조직화 되면서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됐고, 1961년 뉴델리가 중요한 거예요. 1961년도에 이게 통합이 된 겁니다. 위 IMC와 WCC가 아까 말한 레슬리 뉴비긴에 의해서 이게 통합이 되어서, 위쪽으로 CWME는 이제 WCC에 속한 Commiss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으로 분리된 것, 이렇게 속한 조직이 되는 거고, 두 번째 중요한 건 1968년 웁살라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되어서 그때 성경을 인정하고, 정의하는 것이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면 거기에 보면 이제 1970년대 Frankfurt Declaration이 나온 거죠. Peter Beyerhaus 박사의 의해서, 1968년도에 제안해 1970년대 프랑크프르트 선언이 나고, 또 그 보다 앞서 1960년대에 베를린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아래쪽은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이었던 거예요. 여기에 보면 World Evangelical Fellowship도 있고 또 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도 있고, Evangelical Alliance도 있죠. 이렇게 보면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모여서 복음주의자들은 그렇게 깊은 연대감이 필요 없었던 거예요. 왜? 이 백인중심의 선교대회라는 굵직한 대회가 복음주의적이었기 때문에 1948년 이후에 WCC가 가동되기 이전에는 메인 그룹으로 가도 되지 않냐?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아래의 복음주의자들은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결정적인게 1968년도에 웁살라 대회가 급격히 자유주의로 흐르면서 이제는 안 된다라고 해서 시작이 된 게 이제 1974년도예요. 그때 시작한 명칭은 Lausanne Committee on World Evangelization (세계복음화로잔위원회) 입니다.
그래서 이 배경을 보면 왜 1974년도냐? 라고 할 때는 두 가지의 배경입니다. 하나는 WCC로 대표되는 급진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있다는 의지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 당시에 1970년대 우리 장로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국 사회가 얼마나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습니까? 우리나라만 그랬던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독재 국가들이 여기서 일어나기도 하고, 또 무슨 혁명도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 속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성, 복음의 사회적 책임성을 간과한 흐름에 대해서 반성하면서 로잔대회가 출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1974년도가 중요합니다. 1968년도 92년도의 WCC 대회 그 다음에 여러 복음주의자들이 산발적으로 이제는 우리가 함께 연대해야 된다라는 위기감 때문에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1차 대회가 열린 겁니다. 이때 150개국 135교단 출신의 2,473명이 참가합니다. 그때 참가자 50%가 44세 이하 였습니다. 그때 Leighton Ford, Paul Little는 영국 아이비 미국 복음주의자 치료자였고 Jack Dain이라는 분이 기획위원 인물이었는데 이분들이 핵심 인물이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미국은 빌리그래함, 영국은 죤 스토트 이 두 분이 이제 주동이 돼서 자금과 여러 준비 사항은 미국 주도하고, 그 다음에 신학적 콘텐츠는 영국에서 주로 바로 그런 대회가 되었습니다.우리가 이 예배에서 왜 로잔인가? 라는 것에서 교회 역사 속에 지속해 왔던 복음전도도 전통의 연장선이다. 로잔대회는 오직 한 분 주님께 순종하며, 하나의 세상에 직면하며, 하나의 과업을 완수하는 하나의 영혼을 추구한다. 로잔대회는 성경의 원리를 다시 강조하고 복음전도의 긴급성을 다시 확인한다. 로잔대회는 정직하고 진지하게 미복음화 된 세상과 그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한 교회의 자원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런 발표를 했습니다.
이때 1차 대회에 두 가지 특징적인 강의가 있습니다. 하나는 라틴 아메리카의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도전적인 강의였습니다. 복음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우주적 차원 하나님의 구원이 우주적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도 역시 이 우주적 측면을 포함해야 됩니다. 우리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임했다라고 할 때 그것은 피조 세계의 전반을 아우르는 그러한 관점을 가져야 된다 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 사람은 나중에 그 당시에 남미의 전쟁과 가난과 혁명의 이런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응답해야 됩니까? 이 거대한 하늘나라에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야 되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젊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울분을 토하면서 강조했습니다.
1차대회에서 르네 파띠야(Rene Padilla)는 당시에 국제 모임에서는 전부 영어로만 하는 것이 불문이었는데 알아듣지 말든지 스페인어로 강의를 해버렸다는 거죠. 그래 가지고 이 두 가지를 들으면서 왜 내가 경험을 해야 되는가? 그러면서 ‘미국적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레함 쪽에서는 상당히 당황하고 불편해 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단지 교회가 몸치만 커지는 것이 좋은 거냐?라는 그런 비판까지 하면서 ‘우리가 진짜 복음적이어야 한다’라는 비판에 많은 갈채를 받은 것입니다. 이때 미국 기독교인들은 상당히 불쾌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영국의 죤 스토트는 다른 책에서 여기는 제가 안 쓰겠지만, 다른 책에 보면 죤 스토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가슴 아픈 강의 였지만 옳은 말이였다’라고 지지 했습니다. 이게 복음주의자들이 우리가 저런 젊은 학자들의 발표를 배제하고 우리가 복음적일 수가 없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로잔운동에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요소가 로잔 언약에 존 스토트가 이반하는 데 포함시키게 된 겁니다. 사회적 책임, 문화 교육 리더 자유와 평화 이런 어젠다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로잔언약하며 지금 전도와 사회적 책임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우선이냐? 이런 걸로 이제 선교학자들도 많이 따지는데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이게 다 함께 하나로 포함돼 있는 거다. 사회적 책임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말할 수 있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드시 사회적 책임 거기에는 금융이나 이런 어떤 안을 알아주는 거, 의료 선교를 하는 거, 모든 것에서 우리가 다 함께 합니다. 여러분 잘못된 정부에 대해서 우리는 저항할 수 있어야 되고, 잘못된 법에 대해서도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된다. 그러한 것까지 다 그걸 복음주의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또 대회에서 중요한 것이 랄프 윈터(Ralph Winter) 박사가 미전도 종교(AAP, Adopt-A-People) 선교 패러다임을 이것을 추천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교회도 이때 발표된 미전도 종종 개념을 가지고 미전도 종족을 입양한 것입니다. 교회 초기입니다. 그러니까 로잔 1차 대회에서 미전도 종족에 대한 개념과 전략을 랄프 윈터(Ralph Winter) 박사가 발표하지 않았다면 온누리교회에 미전도 종족 입양이나 이런 표현까지 들어올 수 없는 거죠.
그때 한국 대표 조종남 박사님, 한철하 박사님, 김옥길 박사님, 노봉린 박사님, 조동진 박사님 여기에 살아 계신 분은 조종남 박사님, 노봉린 박사님 두 분정도이고, 조종남 박사님 거의 97세 되셨을 거예요. 그래서 조종남 박사님이 저를 부르셔서 당신이 로잔 운동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는 그냥 한 구석에만 참석하면 되는 줄 알고 가봤더니 등이 떠밀리고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범인은 조종남 박사님이십니다. 100세가 되시면 저희가 한번 파티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아직까지 건강하시니까. 하여튼 1974년 로잔 대회는 카이로스적인 모멘트 (Kairos Moment)였습니다.
이때에 이제 15가지 상황을 가지고 존 스토트와 프란시스 쉐퍼, 피터 바이어하우 같은 WCC의 급진적인 신학에 저항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다 수집해서 15가지 항목으로 로잔 커버넌트를 쓴 겁니다. 여기에 보면 복음 전도와 문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교육과 리더십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요소들이 들어간 게 눈에 띄는 겁니다. 근데 2차 대회에 참석한 분들이 1914년도에 한국에 와서 이거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한 이유가 그 당시에는 사회 참여라는 말만 해도 이거 이상한 거였어요. 우리나라에서도 하여튼 굉장히 심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로잔에 대해서 소개가 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로잔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이라는 실제 안으로 적용되는 방식으로 말해졌는는 점에서 하나의
예언과 같은 것이다. 확신과 겸손,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인간의 에너지, 비전과 현실, 주님의 행하심에 대한 기쁨과 인간 실패에 대한 절망, 전략적 사고와 성령의 인도, 지구적 비젼과 지역적 행동, 말과 행동의 창조적인 결합인 언약으로서의 로잔 언약은 로잔 운동의 핵심적 특성으로 영원히 남아있게 될 것이다."
제2차 로잔 대회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1989년도에 열렸고요. 170개국에서 3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그때도 Manila Manifesto라는 마닐라 선언문이 발표됐고 21개의 신앙 고백과 12개 세부 항목이 발표가 됐습니다.
그때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Calling the Whole Church to Take the Whole Gaspel to the Whole World) 그래서 온전한 복음이라는 컨셉을 이제 도입한 것이 마닐라 선언 이때 중요한 것은 토마스 왕의 AD2000 Movement(미전도종족의 전도운동으로 2000년까지 전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제안)도 발표가 됐고,
그 다음에 루이스 부시(Luis Bush)의 10/40 Window의 개념이 2차 로잔대회에서 발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4/14 Window(2010)로 갔다가, 이제 루이스 부시는 Transform World(2012)로 계속 트란스포옴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너무 콘셉트을 많이 바꿔서 좀 그렇긴 합니다만 어쨌든 10/40 Window의 중요한 개념을 발표하셨고, 이 10/40 Window에 헌신해서 우리 도육환 목사님이 스리랑카로 나가신 겁니다. 10/40 Window 그 다음에 텐트 메이커(Tentmakers) 자비량 선교하고 비교해 보시죠. 이때 300개 이상의 많은 선교 파트너십이 일어나서 아마 세계 선교 역사에 가장 많은 선교전략들이 이 대회 이후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한국 대표는 100여명이 좀 더 많이 갔죠. 조종남 박사님이 계속갔고 김선도 목사님, 이종윤 목사님, 한철호 선교사님 이런 분들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로잔 위원회(1989)’가 발족했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복음주의협의회라는 복음주의를 표방한 단체들이 1989년 발생한 것이니까 아직 얼마 오래되지 않은 것이죠.
제3차 로잔 대회는 2010년도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렸고, 198개국 4,200명이 모였습니다. 이때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님께서 에베소서 강의를 하셨고, 클리토퍼 라이트(Christoper Wright)라는 우리 교회에도 여러번 오셨지요. 여러번 설교도 하셨는데 지금은 존 스토트 목사님의 후계자죠 레몬 인터넷이나 후에 이어받으신 분인데 구약의 약자입니다. 이분이 케이프타운 서약(Capetown Commitment)을 거의 다 쓰셨습니다. 로잔 언약을 전수한 케이프타운 서약이 있습니다. 우리 장로님들께 우편으로 다 발송해 드렸을 텐데, 오렌지색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그 뒷족에 보시면 케이프타운 서약 전문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잔 선언도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당회 운영위원회 회의 시작 전에 로잔 언약을 한 챕터씩 읽고 회의를 시작하죠. 이때 이제 발표된 것이 HIS라고 해서 로잔의 기본정신인 Humility(겸손함), Integrity(온전함), Simplicity(단순함) 라고 해서 그분의 백성들의 철학에 대해서 발표 되었습니다.
이제 4차 로잔 대회가 이제 50주년을 맞이해서 1974년부터 시작해서 50년째 되는 2024년도인데 그 사이에 이제 50년 동안 일어난 일이 선교사와 비파송 국가가 바뀐 겁니다. 예전에는 유럽과 북미, 미국 캐나다 였는데 이제는 아시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선교사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글로벌 노스에서 글로벌 사우스로 중심축이 변했습니다. 1970년도에 41.3%가 아시아, 아프리카 남반구였다면 지금은 64.7%로 메이저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제 1910년대만 해도 이제 서구 웨스턴, 이스턴 이라고 불렀다가 그 다음에는 글로벌 노스, 글로벌 사우스 이렇게 했다가, 이제는 메이져 월드와 마이너 월드라고 하고 그래서 선교에서는 메이저로 아시아, 아프리카를 말하는 거예요. Majority World에서 특히 한국 교회가 그 중심적 역할을 감당해야 되는 때가 왔다 라는 면에서 이제 4차 로잔대회를 한국에서 열게 된 겁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치하려고 이렇게 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고 처음에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유치해줄 수 있겠냐고 그래서 제가 단호하게 '아니오'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상황이 참 한국 교회가 영향을 받기도 쉽지 않고 또 저도 이제 로잔 위원회에 한국 의장을 이제 거의 5년 이상 맡았는데 이제 다른 분이 해야 되는데 제가 이거를 맡으면 대회가 끝날 때까지 해야 될 것 같아요. 다른 나라에서 개최하면 열심히 돕겠다. 타국에서 하면 어디든지 우리가 열심히 도울 테니까 다른 나라에서 해달라고 계속 그랬는데, 아무튼 한국 밖에 없다, 한국에서 해야 된다. 그래서 하여튼 여러 가지 기도하는 끝에 우리가 이 책임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이 책임을 지면서 우리도 발전할 것인가? 그런 것 중에서 후자를 택했고 여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도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제가 제안한 장소로 채택이 됐는데, 송도 컨벤시아에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로잔 대회를 강하게 유치하길 원하는 큰 교회가 유치하려고 거액의 후원금을 낼 테니까 우리 교회에서 해달라라고 제안까지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잘됐다 이참에 빠지면 되겠다. 그리고 이제 빠지려고 했는데 저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비겁하게 도망가려고 하느냐?' 이런 말씀을 하셔서 그냥 '제가 알겠다'라고 순종했습니다. 제가 장로님께 '다른 교회 장로님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말리는데, '왜 자꾸 떠미시느냐?' 말씀도드렸습니다. 그래서 주제는 “Let the Church Declare the Reign of Church!” “교회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선포하자”. 그러니까 주제가 나오고 이게 선교적 이었다. 내년도 대회의 모든 텍스트는 사도행전 입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를 쫙 훝으면서 하게 되고요. 5천여 명이 참석하는데 이것이 자기가 참여하고 싶다고 참여 하는게 아니라 심사해서 대표 자격을 부여해 해야 가능한데 이제 5천여 명이 참석할 수 있는 현재 2만 5천 명이 추천이 돼 가지고 5대 1의 경쟁이 있습니다. 이런 유래가 없습니다. 3차 대회까지 간다하면 다 갈 수 있었는데, 이제 5대 1의 경쟁,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시기적으로 한국의 영향력 이런 관심들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이는 대회가 되고, 그 다음에 ‘Polycentric Mission’, ‘From Everywhere To Everywhere’ 이 어디서나 어디에서나 복음 전도하는 ‘From Everywhere To Everywhere’ 이것을 CGN이 또 재치 있게 가져가서 ‘어디서나 모두에게“ 이게 다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여기서 나온 겁니다. 이제는 ‘Polycentric Mission’ 이주민 선교지가 우리 이웃으로 찾아온 거 아닙니까? 그래요. 선교지가 이런 선교의 유형이 바뀐 시대입니다. 한국에서 열리지만 아시아와 파트너쉽이 있고요.
여기에 Organazing Committee와 Program Committee에 아시아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제가 Co Chair Organazing Committee에 마이클 오 대표와 함께 제가 코치로 참여하고 프로그램 계획팀에 OMF 선교단체 지도자들, 의사 출신의 신학의 패트릭 펑이 담당하게 됩니다.한국에서의 준비 위원장을 유기성 목사님 맡아주셨고, 대구 동신교회 문대원 목사님, 실행총무에 김홍주 목사님께서 하여튼 온누리교회 선교분과가 매달 함께 돕고 있습니다. 예전과 달리 이제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을 공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조직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제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서 아시아 지도자들을 많이 세웠고요. 거기 프로그램 기업들하고 제가 추천해서 세웠고, 우리 한국 그리고 아시아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이제 다음 주도 국제 이사들이 송도에 와서 저희와 함께 행사 준비를 하는 그러한 프로그램들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가 한국 교회가 이번 기회에 로잔 정신으로 다 복음적 선교 의식으로 교회도 갱신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유기성 목사님이 준비위원장을 맡아서 하시는 일은 각 도시 마다 다니면서 참여자를 모집을 위한 모임을 열고 있습니다. 이미 부산, 대구, 포항까지 열렸어요. 그래서 이제 각 도시 마다 로잔 목회자들의 모임이 있어서 목회자들에게 이 복음주의 흐름을 설명하고, 내년도 이 로잔 대회에 다 참여할 수는 없지만 봉사자로 참여해 구체적으로 7월 14일에 이제 ‘714 기도대성회’로 한국로잔 위원회 주체로 송도에서 먼저 하고, 또 우리 카운트 다운 집회를 붙여가지고 이제 카운트다운 집회를 로잔4차 대회 준비할 겸 해서 대성회를 함께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여 명의 우리 00국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5천 명의 참석자가 있으면 1인당 2명의 00국 기도자를 붙여서 함께 기도해 주자. 그리고 오시는 분들이 이제 해외에서 오시기 때문에 식사도 적어도 한 2만 원 정도 단가로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그거를 일인당 한 끼 정도를 대접하자.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한 10만 명 후원자들이 와서 준비도 하고, 식사 대접도 하고 그래서 지금 열심히 준비해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존 스토트가 제시한 로잔 운동의 정신을 우리가 이어받아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참여함으로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감동받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복음주의적 승리보다는 복음주의적 참회에 이르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이제 한국 교회의 여러 행사들이 있고, 한국교회에 대해서 한 2시간 정도 한국 교회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는데, 제가 그거를 기획하면서 염두에 두는 것은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잘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회개할 것이 많다. 그런 어떤 복음주의적 참회를 우리가 고백하고 세계 교회에 고백하는 시간이 돼야 된다 라는 그런 시각이고, .
그 다음에 결국은 모든 성도들이 이 세계 복음화 사역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래서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한국교회 여러 대회라는 조직도 만들어 나가고 있쟎습니까? 그런데 조직도가 없는 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사님들 얼굴 사진 내면서 후원금 받고 이런거 하지 않고, 한국 준비위원회는 제 이름도 없습니다. 그냥 국제 조직에 그냥 들어가 있는 겁니다. 저는 모금 위원장 역할만 하고 있는 거고요. 그냥 모금만 열심히 하고 이제 뒤에서 물밑 작업만 하고, 축제 준비는 유기성 목사님이 나서서 열심히 지금 준비하고, 조직도 없는 대회, 그래서 복음적인 대회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면 로잔도 세계 복음화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전통적인 신앙 고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상황과 문제들에 대하여 복음적으로 어떻게 응답하고 적용해야 되는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로잔 운동은 국가적 교단의 조직으로 움직이지 않는 자발적 운동이기 때문에 정기적인 모임과 활동을 가지지 못하지만 선교적 목회자들, 신학자들, 선교사들, 전문인들이 주도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세계 복음주의 네트워크을 대표하는 대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024년도 4차 로잔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함으로서 한국 교회가 세계 복음주의 교회의 흐름에 중심에 있으며 이 대회를 통하여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세계 복음화의 비전과 실천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 로잔 대회를 할 때 온누리교회가 주축이 되지만 우리가 촉매제처럼 한국 교회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가장 많은 헌신을 했지만 가장 티내지 않는 그러니까 로잔 정신 Humility, Integrity, Simplicity 원칙을 잘 지키면서 한국 교회와 성도를 섬기고 한국 교회와 세계 복음주의를 한 역사적으로 이 4차 대회가 복음주의 선교운동이 다시 일어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어떤 그런 역사적 없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여러분들이 함께 협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이 로잔 운동을 한다니까 몇 몇 흑색 선전하는 분이 있는데 심각한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잔운동이 WCC 계열인데 이런거 왜 하냐? 이렇게 막 떠드는 사람이 있어요. 책도 한 권 안 읽고 떠드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런분들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오히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행동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또 하나는 2차 대회 때 피터 아노 박사가 그 스피치를 한번 했는데 고신 교단의 어느 목사님이 피터와 아노박사가 신사도 운동 하는 사람들인데 로잔과 신사도 다 이렇게 잘라 가지고 공격하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그 당시에 1989년도에 부터는 훌러신학교는 가장 복음주의적인 신학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스피치라는 이들이 20여 년 후에 신사도 운동을 추천하면서 문제가 된 것인데 몇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렇게 안 하면 안 되죠. 그래서 그런 거에도 여러분들이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로잔으로 돌아가 온누리 교회가 참여하고 참여해야 되는 가장 복음적인 세계적 네트워크다 이렇게 보시고 이것이 2024년도에 제가 또 한국 로잔의 의장을 맡고 있는 이 기간 안에 개최하게 되서 제가 여기까지는 섬기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을 알리고 이렇게 정치적 야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섬겨야 되는 대회이기 때문에 장로님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6월 9일, 온누리교회 장로수련회에서 이재훈 담임목사님이 강의하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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