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견을 넘어 자유의 몸으로 (행10:24~48) 말씀: 이재훈 목사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장벽이 있습니다.
①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의 마음에 완고한 장벽이 있고,
②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한 장벽도 있고,
③복음이 전해지는 사명에 비해, [부족한 일꾼들]이 또 하나의 장벽입니다.
④그러나 사도행전을 통해 발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이라.”는 장벽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신앙인의 편견”입니다.
[편견]은 선입관이나 고정관념과는 다릅니다.
[선입관]은 어떤 체험에 앞서 가지게 되는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선입관]이 다 잘못은 아니지만,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잘못됐습니다.
또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한 문화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지식입니다.
어떤 고정관념은 잘못되었지만, 어떤 고정관념은 또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견]은 언제나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선입관], [잘못된 고정관념]이 고착화될 때, 균형을 잃어버리고,
치우친 생각을 할 때, “우리는 편견이라.”고 말합니다.
[편견]은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편견]은 속단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좋은 의미로 시작하지만, [편견]이 개입되면, 이상하게 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옛 자아]의 영향력으로”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 자유로워지고 복음 안에 더 풍성해야 하는데,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 좁아지는 까닭은 “편견이 많기 때문”입니다.
①하나님에 대한 편견, ②세상에 대한 편견, ③그리고 교회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편견이 굳어질 때는, “아무도 바꾸지 못하는 [무서운 고집]”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새벽이 되면, 교회에서 [새벽종]을 쳐서, 새벽을 깨웠죠.
그러나 요즘에는 이웃 주민들에게 소음 공해가 되어, 교회가 종 치면 큰일 납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에게 편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택하셔서 그 민족과 오랫동안 함께 하셨고,
그 민족을 통해 깨달았고 체험한 유대 민족이 가지고 있던 편견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구약]만을 인정하고,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 “구약시대의 세계관”으로
현대를 사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였고, 성령을 체험했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에게도 편견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죠.
[베드로]에게도 그런 편견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편견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10장의 말씀에서,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이, 예수님 믿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베드로의 편견과 그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편견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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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라는 사람은 로마의 고급 장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고넬료]가 어느 날 환상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베드로]를 초청하여 데려오라.”고 지시하여,
그가 [베드로]를 만나러 갑니다.
이와 동시에 [베드로]가 또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배가 고파 무엇인가 먹을 것이 없을까?”라고 생각할 때,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온갖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음성이 들려오는데,
그 보자기 안에는 레위기의 말씀에 먹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는 부정한 생물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말도 안 됩니다.
주님, 저는 불결하고 이 더러운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까,
15절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불결하다고 하지 마라.”는 음성이 두 번째로 드렸습니다.“
오랫동안 율법을 따라 살아온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지금 먹으라.“고 명하시는 분이 ”율법을 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이제 그 율법이 폐지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을 주시는데도,
”그럴 수 없다.“고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불결하다.“고 정하셨지만,
이제는 ”깨끗하다.“고 정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인의 편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더 중요시하는 [사상적인 우상]입니다.
유대인들이 신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구약의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사상적인 우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 안에 있었기에,
①”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
②”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일으켰다.“는 것,
③”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따라, 그의 집에 방문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에 함께하도록 고치신 것입니다.
이제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왜,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었는지?“를 듣고,
[베드로]가 고백한 말들을 보면, ”깜짝 놀랐다. 깨달았다.“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이런 [깨달음의 고백]들이 나오는데, 이게 뭡니까?
그것은 ”[편견]이 깨어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날마다 편견이 깨지는 것“을 경험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유를 느낄까요?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온 [편견]이, 하나씩 벗겨져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이 [베드로]의 말을 통해, 신앙인이 가질 수 있는 두 번째 편견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도전입니다.
오늘 본문 34- 3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내가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민족이든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행10:34-35)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먼저 부르신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었을 뿐“입니다.
유대 민족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부르신 것뿐인데, 먼저 부름을 받은 이들이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편견의 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1장에 보면, 이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방문한 것이 알려졌을 때,
유대인 신자들은 “편견에 사로잡힌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비난하는 이들은 “분명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이방인의 집에서 식사할 수 있느냐?“는 것은 [편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편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해하기 힘든 집단이 되어 버리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되어버리게 되지요.
[복음]을 통해 우리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모든 이들이 동일한 성령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안에 [편견]이 무너져 갈 때,
결국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됐지,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됐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도 ”편견에 사로잡힌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것을 [자만심]으로 생각하는 ”무서운 편견“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복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복음 안에서 풍성한 자유를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