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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박물관 (2017.02)

다이나마이트2 2017. 2. 17. 11:11

충주박물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중앙탑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6년 11월 유물전시관으로 시작하여

1992년 충주박물관으로 등록하고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의 통합으로

시립 충주박물관으로 통합하여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며 종합박물관으로 발전하였다.

충주박물관 종합 안내도.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 그리고 야외 전시관도 있다.

먼저 충주박물관은 남한강이 흐르는 사적공원 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1관, 제2관, 야외전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강변을 따라  산책코스가 꽤 잘 되있어 한 바퀴 둘러보기에 기분 전환겸 좋을 것 같네요.
입구 주변에는 석탑과 비석,석물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충주 박물관은 충주 시민들이 직접 유물을 모아서 만든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충주 시민들에게는 더 의미가 깊은 곳일 것 같은데 박물관 내 유물들은

대부분 충주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고 전체적으로 충주의 역사와 문화에 초점을 맞춰서 전시되어있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절터이다.

석조와 목구조를 합성시킨 석굴사원으로 석굴을 금당으로 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향하는 절터라고 한다. 1987년 7월 18일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충주 미륵리 사지 자료들이 있습니다. 5층 석탑이 대표적인 유물인 것 같습니다.

충주 승선사지 유물도 이곳에 전시가 되고 있습니다.

승선사는 고려 초 광종이 자신의 모친이자 태조의 세번째 부인인 신명 숭선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각종 유구와 금동 보살상 등이 발굴돼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아미타후불탱화 / 조선시대.  석조여래좌상 / 고려시대.

 

조선시대 목조나한상

 

 

책거리그림 병풍 / 조선시대.

과안(科案) / 조선시대.
충주에 사는 정시영의 과거시험 답안지.

일월성수도(日月星宿도) / 조선시대.
천체의 위치를 그려 놓은 그림.

포도도 팔곡병풍 / 조선시대.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낭곡(浪谷) 최석환의 포도 그림.

오른쪽 그림은 추원감시도라고 합니다.

중앙에 위패공간을 두고 사당위로는 소나무를 좌측에는 연꽃을 우측에는 모란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화문석 위 제상에는 과일과 음식이 담긴 그릇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색감이 참 아름답습니다.

조선시대 놋그릇과 놋대야

조선시대 철광석과 오른쪽은 도가니

십장생도 : 십장생의 종류에는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이 있습니다.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충주 지역의 여러 사찰에서 특히 충주댐 건설로 인해서 수몰되는 지역의

뮤물들을 이곳으로 옮겨서 전시를 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충부 박물관 2관입니다.

삼국항쟁지도가 있네요. 중원이 중요하기 때문에 힘이 있을 때는 세상을 지배하겠지만

힘이 없을 때에는 사방에서 동네북처럼 당한 지역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중원의 선사시대(구석기와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지방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주변에 석회암 지대가 발달되어

동굴과 바위를 이용한 구석기시대의 생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동굴유적으로는 단양 금굴과 상시바위 그늘유적,
제천 점말 동굴유적, 청원 두루봉 동굴유적 등이 있으며 한데 유적으로는 단양 수양개유적,

제천 금룡동과 용탄동유적, 청원 샘골유적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
충주를 비롯한 중원지방의 신석기 유적은 우리나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문화의 교류와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표유적으로는 남한강 유역의 동량면 조동리가 있고

금강 유역에는 옥천 대천리, 영동 금정리 유적 등이 있다.

중원의 선사시대(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중원 지방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은 고인돌과 집터이며 고인돌은 신석기 후기 옥천 안터에서

시작하여 제천 황석리에서 꽃을 피웠고 충주댐 수몰지역 조사 때에도 하천리, 계산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집터 유적으로는 동량면 조동리가 대표적인데 어로 활동과 농경생활을 알려주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 되었다.
초기 철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와 청동기시대는 일정 기간 겹치기도 하는데 세형동검과 같이 청동기는

점차 의기화(儀器化) 되던 시기로 충주댐 수몰지역인 동량면 지동리와 하천리 유적이 이 시기에 속한다.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백제, 고구려의 중원.
삼국 중 충주를 최초로 지배한 나라는 백제로 이 지역이 본래 마한의 옛 터 였기 때문에

초기 백제의 세력에 편입되었고 미을성, 완장성, 낭자곡성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원삼국시대 백제계 고분군인 충주 금룡동 유적,

탄금대의 제철 유적과 공방, 장미산성 등이 있다.

신라의 중원 진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신라는 6세기 진흥왕 시기에 백제와의 연합을 시도하고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죽령을 넘어 단양의 적성으로 진격하여 한강의 상류를 차지하였다.
그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까지 빼았으면서 한강의 전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고

중원 지역은 신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557년 국원(國原 : 신라시대의 충주)은 소경(小京)으로

격상 되었다.

통일신라의 중원.
통일신라에서 충주는 경주 다음가는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문무왕 때는 경주보다

더 큰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문왕5년(685년) 지방조직 개편 때 생긴 9주5소경 중 충주는 중원소경으로 불렀으며

이후 5소경의 중심이라는 뜻에서 중원경으로 바꿨다.

 

탑평리, 단월동 유적.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국보 제6호 탑평리 칠층석탑과 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치 등을 비롯한

신라와 고려시대의 탑평리 발굴 유물 및 건국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한 통일신라시대의

단월동 돌방무덤군 및 발굴 유물.

 

 

 

 

 

조창(漕倉), 조운(漕運).
조운은 고려, 조선시대에 각 지방에서 국가에 수납하는 전세(田稅) 및 대동미를 뱃길을 따라

서울의 경창까지 수송하던 것을 말하며 조창은 각 출발지와 도착지에 세곡을 모아두는 창고를 말한다.
조선의 조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한강의 조운인데 그 대부분을 점하는 것이 서울에서 충주까지의 수로이며

정종 때에는 충주에 덕흥창을 세워 충청도 지방의 세곡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충주.
태조4년(1395년) 충주는 개편된 충청도에 속하여 도 감영을 충주에 두고 관찰사를 배치하면서

충청도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다.
세종31년(1449년) 충청도가 좌도와 우도로 나뉘면서 충주에는 좌감사가 배치되었으며 세조3년(1457년)에는 충주진영이 설치되어 단양, 제천, 음성, 청풍 등을 관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공주로 감영이 이전하였다가 1896년 다시 충청북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으나

순종2년(1908년) 교통 불편을 이유로 도청이 청주로 이전하였다.

호암동 유적.
충주시 호암동에서 발견된 복합유적지로 중기 구석기시대의 찍개 등의 유물과 50여기의 삼국시대 고분,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의 분묘 1,300여기 및 고려시대의 토성, 조선시대의 토기 가마 등 이다.

고려시대의 충주.
고려 태조23년(940년) 충주경을 충주로 개칭하고 성종2년(983년)에는 전국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충주목이 되었으며 고려 중기 5도 양계의 지방제도가 확립될 때는 양강도에 속하기도 하였다가

고종41년(1254년)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충주성 전투 이후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으로는 상모면 미륵리사지, 문숭리 숭선사지, 하천리 정토사지 등이 있고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등의 유물이 남아있다.

 

강수(强首) 영정.
강수는 설총,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히는 인물로 유학자이자 6두품의 신분으로
높은 유교적 교양과 학식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신라 사회와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이 영정은 충주시의 역사 발굴사업으로 추진된 표준영정 사업 중에서
2003년에 지정된 것으로 공식적인 행사와 교육자료에 사용되고 있다.

우륵 가야금 연주상,

제작 엄태식, 크기 175 x 100 x 135㎝

익헌공증시교지(좌) & 효간공증시교지(우).

 

충주의 명현들이 자랑스럽게 소개되고 있다.

삼국시대 우륵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에까지 있고 빈칸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