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때가 오고 있다 (계18:20~24) 2025.05.25

승리의 때가 오고 있다 (계18:20~2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성도들]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언제까지 우리의 피 값을 갚아주지 않으시렵니까?”라고 기도했던 6장 10절에 대한 응답이고,
이런 [의문]은 역사적으로 계속 던져져 왔습니다.
지난주 15- 16장의 말씀에서, [최후의 심판]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①첫째는, 마지막 심판이 임할 때에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②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구원의 역사”가 베풀어지는 심판이기 때문에, 의로운 심판입니다.
③셋째로, [마지막 심판]은 “두 번째 출애굽 사건으로, 구원이 함께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장에 나타난 재앙들의 리스트를 보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로부터 자유케 될 때,
임했던 10가지 재앙”을 연상하게 됩니다.
바다와 강이 [피]로 변하고, 여러 가지 재앙들이 “출애굽 당시의 재앙들”이 연상됩니다.
그것은 [첫 번째 출애굽]이 바로 미래에 있을 진정한 출애굽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침례교 목사님은 [침례]를 줄 때, 그분은 “아이 킬유 인더 네임, 오브 지저스“
(내가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인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대부분 목사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말합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은 직설적이지만, 아주 성경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침례]할 때,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의미이고,
우리가 물에서 다시 나올 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주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은 이런 [심판과 죽음]을 통과하여,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 18장에서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①그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가,
②어떤 대상에게 이런 심판이 임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17- 18장을 함께 모아, 설교하게 됩니다.
여기에 [큰 창녀]가 “큰 도성이고, 바벨론의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17장 1-2절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리로 오너라. 많은 물위에 앉아 있는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여 주겠다. 땅의 왕들이 그녀와 더불어 음행했고,
땅에 거하는 사람들도 그녀의 음행에 포도주로 인해 취했다.’“(계17:1~2)
[심판의 대상]이 곧 [큰 창녀]라고 불리는 대상, ”바벨론에 임한다.”는 겁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한 붉은 짐승을 타고 있고, 온갖 화려함으로 장식하고,
손에는 가증스런 금장이고, 이마에는 “큰 바벨론 창녀들과 땅에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로 취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공격하며, ”어린 양을 예수님을 대적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큰 창녀의 이미지]는 ”성적 타락의 이미지로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성적 타락과 관련되어, [사단의 목적]은 ”우상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중한 선물임에도, [사단]은 ”사랑을 돈으로 사는 것“으로 속입니다.
[대인 관계]는 헌신임에도 불구하고, ”거래 관계“로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의 성]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영적인 도구“인데,
이것을 ”탐욕의 도구“로 바꿔버리는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음행]으로, 세상을 혼란케 하는 [사단]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우상 숭배]는 ”반드시 음행과 관련이 되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 창녀]는 19장 이후에 나오는 ”동정녀 신부“와 대조가 되고 있어요.
17-18장에는 [큰 창녀] 혹은 [큰 음녀]로 나타나는데,
19장부터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등장하는 [정결한 신부]가 나옵니다.
[음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지만,
[신부]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헌신합니다.
[음녀]는 여러 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현란한 옷을 입고 있지만,
[신부]는 깨끗한 세마포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음녀]는 왕들과 상인들을 유혹하고, 경제적, 정치적 부패로 얼룩져 있지만,
[신부]는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두 여인이 완전히 반대를 이루어 대조가 됩니다. 잠언 1장- 9장에 나오는,
①미련한 여인과 ②지혜로운 여인이 대조되는 것처럼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은 사실은 짐승에게 사로잡힌 [큰 창녀]로 묘사 되는데, [거짓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 음행하는 존재가 되어, 결국 [큰 창녀]는 짐승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짐승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악]은 결코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죽일 뿐입니다.
[악]은 철저히 속이고, 이용하고, 나중에는 버립니다.
그러니까 [악]과 타협하고, 악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멸망당합니다.
[악]은 질서를 세울 수도 없고, 보존할 수도 없고, 질서를 무너뜨릴 뿐입니다.
17장에서는 한 [여인]으로 비유했고,
18장에서는 “[큰 창녀]라고 불리는 여인“은 의인화 하여, “큰 도성 바벨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이 “구약 시대에 바벨론”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당시에는 [로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당시 여러 도시들을 지배하며,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하였고.
황제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성도들을 죽였기에, 바로 그 로마가 [큰 창녀]라는 것입니다.
그걸 알 수 있는 17장 9절에 보면, “이 여인이 일곱 산 위에,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다.”고 말씀하는데,
실제로 [로마]가 “일곱 언덕 위에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18장에서 말하는 “큰 도성 바벨론”은 [로마]를 의미하지만,
직접 [로마]라고 말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의 [공통점]은 자신을 신성시하는 극도의 “교만”입니다.
세상에 있는 제국의 공통점은 힘이 강해지면 교만해 집니다.
[교만의 절정]은 자신을 숭배하여, 주변 나라들을 침범하고, 약탈하여, 자신을 신성시하고,
더 나아가 지도자를 숭배하게 강요하고, 결국은 자신을 숭배하게 만드는 “큰 창녀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을 말씀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될 것인가?”를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1) 첫째로/ 4절의 말씀에서, “그 도성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때, 나는 하늘에서 다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들아 너희는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 이는 너희로 그녀의 죄악들에 동참하지 않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계18:4)
여기서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는 것은 “그 도성에서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상숭배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기후 위기까지 순교의 각오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부터 떠나고, “화려한 유혹으로부터 나오라.”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진정한 도성이 있음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20절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예언자들아, 그 도성으로 인해 즐거워하라.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그녀를 심판하셨기 때문이다.”(계18:20)
여기서 “그 도성으로 인해,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역설적인 말씀]이죠.
바벨론 도성 큰 창녀가 “심판받아 멸망된 것 자체로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한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 심판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잘 됐다, 고소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도성은 무너지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①큰 창녀와 ②정결한 신부가 ”대조가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이제 19장 이하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이 나타납니다.
①큰 창녀인 [바벨론]과 ②대조적으로 이제 [새 예루살렘의 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19장에서 22장까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는 절대 ”하나님의 도성“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살기 좋은 도시라고 해도, 결코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도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도성일 뿐이며,
[하나님의 도성]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계시록 19장] 이하에서, ”새 예루살렘의 도성이 약속되었다.“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3-14절의 말씀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 밖으로 그분에게 나아갑시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아니라,
다만 장차 올 도시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13:13-14)
우리는 이 땅에 영원한 도성이 아닌, 장차 올 하나님의 도성을 갈망하는 이들이기에,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허락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이 땅에 존재하는 바벨론의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