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0 장로회

순천기독교 역사 박물관 2025.05.10

다이나마이트2 2025. 5. 11. 23:06

2025년 5월 10일(토) ~ 11일(주일) 1박 2일 동안 1530 장로회에서 부부로 여수, 순천지역 선교 역사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1530장로회는 2015년 온누리교회 3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에 30명의 장로들이 장립 했고 금년이 장립 10주년이 되었다.

장로 장립 10주년 기념 행사 겸 동기 장로님 가운데 여수에서 온누리의원을 하시고 계시는 장로님이 계셔서 그렇게 방향을 잡았다.

1호차는 서빙고에서 13분의 장로님 부부가 별도의 버스로 출발을 했고. 양재에서는 7분의 장로님 부부가 아침7시에 양재 온누리교회 식당에 모여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40분 비가 오는 중에 여수로 출발을 한다.

여수에 살고 계신 장로님 부부가 있고, KTX로 내려 오시는 부부도 있었고, 오전 진료를 마치고 오후부터 참여 하신 부부도 있었다.

장로 장립 10주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어느 동기회 보다 단합도 잘되고 참 자랑스런 동기회이다. 

양재에서는 박 장로님의 기도로 다함께 출발을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침 7시 40분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순천에 12시 40분에 도착을 해서 명궁관이라는 보리굴비 집에서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다.

첫번째 방문지는 순천시 기독교 역사 박물관이다.

호남지역 기독교 100년의 성지 ‘매산등’ 근대문화유산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독교 역사박물관 상설 공간이다.

순천시 매산동 일대는 조선시대 이래로 아이들의 풍장터(애기 장터)가 있었던 버려진 땅이 였다고 합니다.

1913년 난봉산지락 언덕에 미국 남장로교 순천선교부가 설립 되었다. 교회, 학교, 병원과 함께 선교사 주택이 건립되면서

선교사 마을이 형성 되었습니다. 1986년까지 교육, 의료, 복음 분양의 8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이 지역을 위해 헌신하셨다.

이 지역 전체가 문화재급의 역사적인 지역이다. 곳곳에 아름다운 간판이 있었다.

호남 기독교 100년의 역사를 품에 안은 순천시 기독교 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2012년 11월 개관을 했다고 한다. 순천시 기독교 역사 박물관은 근대문화의 시작과 함께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아마 전국의 광역 자치단체, 기초자치 단체 대략 250개 가운데 한 손 가락에 곱을 정도로  특별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우리 1530 장로회를 잘 안내해 주시기 위하여 해설사 이영선 선생님이 수고해 주셨다. 기독교적인 이름이다. 이 사람은 영원히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 이라고 소개해 주셔셨서 박수를 받았다. 

이 박물관이 2012년도에 이렇게 기독교적인 것만 따로 해서 이렇게 건물을 해놓은 것은 상당히 나름대로 의의가 있습니다. 지하1층에는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활동하셨던 역사적인 사건들 쭉 정리해 놨고,  2층에는 순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셨던 선교사님들, 100년 넘게 이어 온 언더우드 가문하고 린튼 가문하고 가계도, 복음, 교육, 의료 선교사님들의 활동들을 쭉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간단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쭉 둘러보시는 걸로 하고 우선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하로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입구에는 이런 안내 데스크가 놓여 있다. 지방자치 시대에 시 예산을 반영해서 이런 복합 문화 공간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참 신선하다. 순천( 順天)은 '하늘의 소리를 듣는 곳' 이란 지명을 가진 곳인데 지명에 맞게 발전 하는 것 같다.  중국의 맹자도 '順天者興, 逆天者亡' 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는 망한다고 해석한다. 대한민국 생태수도 순천, 하나님이 이곳을 축복하시고, 선교사님들의 믿음의 유산을 이어 받아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도시로 발전하길 기도한다. 

복음의 빛으로 번지다. (Spreading out as the light of the Gospel) 지하 1층으로 내려 가는 계단 벽에 이렇게 되어 있다.

순천 매산 언덕에서 시작된 복음의 빛이 전남 동부권으로 퍼저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9개의 원을 성령의 열매를 상징하고 있으며, 녹색은 복음의 성장과 번영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 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한국 기독교 전래가 연대기 순서로 되어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청나라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형성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로 한국 천주교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우리 기독교는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인 알렌의 입국으로 소래교회가 설립되고, 이수정이 일본에서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고, 1885년 언더우드(장로교) 선교사와, 아펜젤러(감리교) 선교사가 인천에 도착함으로 배제학당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1886년 이화학당이 설립되었고, 1887년 새문안장로교회와 정동감리교회가 세워졌고, 1892년에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7인이 입국하게 되었다. 1913년에 순천선교부가 설립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시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되는 것 같다. 이런 선교사들의 기도가 지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않히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멘.
H.G언더우드 선교사 (1856-1916) 

-소설 '양화진 이야기 선교사' 정연희, 1992) 씨가 쓴 기도문이라고 한다.

미국의 감리교와 북장로교가 불을 붙여 놓은 한국의 선교에 당시 중국, 이태리, 브라질, 멕시코, 쿠바, 희랍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던 남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는 뒤늦게 참가하였다. 북장로교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안식년이 되어 미국에 돌아가서 1891년 9월에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McCormick) 신학교에서 한국선교 현황에 대한 보고 강연을 하였다. 이때 당시 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 B. Tate, 崔義德)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테네시 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열린 미국 신학생연합 외국선교회에서 역시 언더우드가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하였고, 당시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유학 중이던 망명객 윤치호(尹致昊)가 한국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이때 이 모임에 참석했던 맥코믹 신학교 학생인 테이트, 유니온 신학교(Richmond) 학생인 존슨(Cameron Johnson)과 레이놀드(William Davis Reynolds, 李訥瑞)는 큰 감동을 받고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친구인 존슨으로부터 내쉬빌 대회의 보고를 듣고, 한국에 관한 책들을 읽었던 전킨(William McCleery Junckin, 全緯廉)은 이들과 함께 한국 선교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의 꾸준한 노력과 기도로 1892년 8월 남장로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는 테이트와 레이놀드, 그리고 전킨을 한국 초대 선교사로 선정하였다. 최초로 3인의 선교사가 정해진 후 선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잇던 4명의 여성이 이에 가담하여 `조선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4명의 여성은 테이트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태),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젼킨의 부인 레이번(Mary Leyburn), 그리고 레이놀드의 부인 볼링(Patsy Bolling)이었다. 이들을 합하여 흔히 “7인의 선발대”라고 부른다.

7인의 선발대는 1892년 9월 7일 선발대의 성공을 비는 파송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미국을 출발하였다. 이들 중 데이비스 양은 1892년 10월 18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나머지 6인도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처음 한국에 도착한 이들은 추위 속에서 불편한 환경을 극복해내야 했고, 언어훈련도 시급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초기활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선교훈련과 준비하는 과정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7인의 선발대 기운데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 목사, 신학자, 성서번역가, 언어학자, 서울, 전주, 목포, 평양에서 활동하셨다. 성서번역위원, 한영사전 편집책임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 독노회장을 역임했으면 45년간 한국선교에 기여했다. 페시 볼링 (Patsy Bolling) 레이놀즈 목사의 부인. 남편과 함께 45년간 한국선교에 기여했다.

전칸 (William M. Junkin, 전위렴)  목사, 서울, 군산, 전주에서 활동했다. 군산에서 구암교회와 개복교회를 개척했고,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선교와 교육을 위해 활동 중 과로로 43세에 별세했다.

메리 레이번 (Mary Rayburn) 전킨 목사의 부인. 한국 선교 중 세 아들과 남편을 잃고1908년 귀국했다.

테이트 (Lewis B. Tate, 최의덕) 목사.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개시함으로써 호남선교의 최초 개척자가 됐다. 그의 전도로78개처에 교회가 개척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교수, 성서공회이사장, 전라노회장을 역임했으며 33년간 한국선교에 기여했다.

메티 테이트 (Mattie Tate. 최마태) 오빠인 테이트 목사를 따라 내한하여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했다.1898년 기전여학교를 세우고, 여성과 아동선교에 44년간 헌신하였다. 특히 한국 민속어에 능통했다.

리니 데이비스 (Linny Davis) 처녀선교사로 입국하여 군산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활동한 여장부였다. 1898년 헤리슨 선교사와 결혼 후 전주로 이사했다.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환자를 돌보다 열병에 전염되어 41세에 별세하셨다.

선교구역 분할정책 : 예양협정(禮讓協定 : Commity Agreements) 에 따라

전라남북도는 미국남장로회, 경상남도는 호주장로교회, 경상북도는 미국 북장로교회  함경남, 북도는 캐나다장로교회가 선교구역을 분활 하는것으로 선교사들 사이에 신사 협정이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한 다음 해인 1893년 1월 28일 북장로교 선교사 빈톤(Dr. Vinton)의 집에서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참석하여 「장로교 미션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무를 처리하였는데 여기서 장차 한국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두 개의 안건이 채택되었다.
첫째는 예양협정(禮讓協定 : Commity Agreements)의 성립이다. 즉 각 선교회가 사업의 중복과 지역의 이중 점거에서 오는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남장로교는 아직 점거되지 않은, 선교적으로 미개척지인 전라도와 충청도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합의를 한 것이다.
둘째는 먼저 한국에 온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정책의 기본원리로 채택했던 네비우스 방법을 근간으로 보다 구체적인 선교 정책을 공식으로 채택한 것이다.
위의 「미션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전라도는 남장로교의 선교 영역이 되었고, 전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려오게 되었다. 1893년 5월 남장로교 선교회는 레이놀즈 목사의 언어선생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어 선교사들을 위한 집을 구입하게 하였다. 성밖에 집을 구입한 것은 아직까지 외국인들의 성내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9월 테이트 목사와 전킨 목사가 선교지를 시찰하기 위하여 전주에 왔다가 2주간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전주를 산곡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5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라고 표현하였다.
1894년 2월, 남장로교 선교회 제2차 정기 연례회는 테이트 목사와 그의 누이동생 테이트양을 전주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일이 잘 진행될 경우 가을에 상설 스테이션을 개설하기로 하였다. 3월 19일, 테이트 목사는 말을타고, 여동생 테이트양은 가마를 타고 서울을 출발하여 6일만에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이들은 이전에 구입해 둔 초가집에 머무르면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척외사상(斥外思想)이 팽배해 있던 보수층의 사람들은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테이트 목사 남매가 거처하는 집의 대문을 부수며, 갖가지 위협을 가해 오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트 양은 전주에 거주하게 된 최초의 서양 여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 여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내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녀를 구경하러 온 4백 ∼ 5백명의 여인들과 접촉할수 있었고 , 이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정도의 간단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테이트 목사는 그의 한국어 선생과 함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안내소책자를 배포하면서 전도활동을 하러 다녔다. 마침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5 ∼ 8명이 되었는데 이 중에서 6명이 성서의 진리를 확신한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호남선교부의 설치 장로교선교연합공의회의 선교구역 분활로 남장로교는 호남지역을 배정받게 됐다. 그에 따라 레이놀즈와 드루 선교사는 1894년 3월 27일부터 1894년 5월 12일까지 호남지방 선교 답사 여행을 했다.레이놀즈는 인구의 집중도,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 바다를 통한 접근성, 내륙과의 연계성, 후보지의 토지 구입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장차 전라도 선교의 거점 지역으로 군산,전주, 목포, 우수영과 순천을 선발하여 선교회에 보고했다.이 가운데 우수영을 대신하여 광주에 선교부가 세워짐으로서 호남지역 5개소 선교부가 세워졌다.

전주선교부 1895년 : 1894년 테이트 남매가 전주에 정착할 생각으로 내려왔으나 동학농민운동으로 철수했다. 1895년 레이놀즈, 테이트, 해리슨이 다시 선교 활동을 재개했다. 서문밖교회,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예수병원이 설립 되었다.

군산선교부 1896년 : 1895년 전킨과 드루가 군산에서 처음으로 선교를 시작했다.1896년 데이비스가 합류했다. 구암교회, 개복동교회, 구암예수병원,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가 설립되었다.

목포선교부 1897년 : 벨은 전라남도 남부지방 선교 후보지로 나주에선교부를 개설하려 했으나 주민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목포 개항을 계기로 1897년 벨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후에 오웬과 스트레퍼가 합류했다. 양동교회, 영흥학교, 정명학교, 프렌치병원이 설립되었다.

광주선교부 1904년 : 광주선교는 벨과 오웬 선교사가 목포에서 광주로이동함으로써1904년 12월 시작되었다. 양림교회,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고, 기독병원이 설립되었다.

순천선교부 1913년 : 1909년 오웬 선교사의 죽음으로프레스톤과 벨 선교사가 순천 선교부 개설을 건의 했다.1910년 4인 위원회 (프레스톤, 니스벳, 윌슨, 해리슨)에서 선교부 개설을 결의하고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이 완료 됨으로서 순천선교부가 개설되었다. 매산학교, 메산여학교, 알렉산더병원이 개설되었다.

순천 선교부의 개설 배경이다. 광주 선교부보다 약 10년정도 뒤 늦게 설립이 되었다.

포사이트 선교사는 1909년 4월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광주로 조랑말을 타고 갔다.

도중 포사이트는 살려달라고 외치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한센병환자였다.

포사이트는 조랑말에 여인을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로 갔다. 광주에 도착했을때 오웬 선교사는 이미 죽었다.

포사이트는 자신이 태우고 온 여인을 치료하기 위해 광주 동남쪽 벽돌 가마터에 임시 거처를 하고 치료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 치료소의 시작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센병 환자들은 과우로 모여 들었고 광주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윌슨 선교사는 한센병을 치료하는 병원 시설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광주시민들의 반대로 한센병 치료시설을 광주를 떠나야만 했다. 2년여에 걸쳐 이주하여 옮긴곳이 지금의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이고 이때부터 애양원이라 불르게 되었다.

율촌교회 장로들이 이곳으로 오라고 요청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른쪽 위에 조그마한 원 안에 있는 장천리교회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교회이다. 

내가 눈으로 보는 것과 옆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열심히 설명해 주신 해설사님 감사합니다.

1920년대 선교사들의 여행 가방, 드럼통에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 올 때 옷 가지난 물품을 담기도 하고, 분유를 담아 온 드럼통이라고 한다. 한 드럼으로 6개월 정도 아이들이 분유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선교 역사상 참 특이한 부분이다. 선교사 없이 1784년 이승훈이  청나라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해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로 한국 천주교가 시작되었고, 1884년 일본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의 수행원 이수정에 의해서 일본에서 마가복음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이것을 1885년 4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지고 왔다.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이미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교회와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었다는 것을 정말 놀라운 일이다.  

존 로스 선교사(목사)가 서상륜 등의 도움으로 간행한 최초 한글 성서이다. (누가복음이다)

천주교의 고해성사 준비를 위한 성찰서라고 한다.

전문 용어로 대가리 맞던 담뱃대가 있다. 한대 맞으면 머리에 혹이 난다. 요즘은 볼 수도 없는 풍년초 담배도 있다.

선교사님들이 어린이 교육에 얼마나 헌신적이 였는지 고개가 숙여진다.

옛날 이발소에서 머리 깍고 머리 감을 때 사용하던 물 조리개가 보인다.  

1530장로님들은 모두가 학구파들 이신가요? 참 강의를 열심히들 듣고 계십니다. 흙벽돌에 초가지붕 시대에 화강암 대리석 벽에 2층 집에 기와집 문화충격을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해외 선교사님들도 이렇게 대우해 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순천노회사도 기록되어 있다. 1932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11회 총회에서 전남노회로부터 순천노회의 분립이 결정되어 같은해 10월 3일 순천노회가 조직되었다. 순천노회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와 박해, 여순사건, 한국 전쟁등 큰 시련을 격으면서도 굳건하게 성장해 왔다.

신사참배

일제는 한국의 종교와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식민지화를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와 교회는 폐쇄되었으며,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했다. 순천노회도 일제 강압을 못 이기고 1938년 구례교회에서 개최한 제22회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선교사들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순천노회를 탈퇴하고 매산학교를 폐교했다. 그들은 1940년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당했다. 순천노회 목사들은 다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원탁회 사건은 신사참배 반대를 목적으로 순천중앙교회에서 황두연 장로를 중심으로 10여명의 학생들이 원탁회를 조직하고 성경공부를 했는데,  '신사참배는 우상이다"라는 기록이 일제 경찰에 발견되어  목사가 구속되고 온갖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순천노회 목회자 15인 구속 사건 : 순천노회 이기풍 목사,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일찌기 구속이 되었고 1940년에 목회자 일제 검거령이 내려져서 전국에서 193명이 체포되었는데 순천노회에서 15인이 구속되셨다.

여수 순천 10.19 사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정치적 이념대립은 민족간의 큰 갈등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출동명령을 거부한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군인들이 1948년 10월 19일밤 여수 순천 10. 19 사건을 일으켰다. 2천여명의 병력을 모은 반군은 '남북통일, 경찰타도'를 주장하며 여수읍내를 점령했다. 이들이 여수, 순천,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등 동부 5개 지역을 장악했다. 정부는 광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10월 23일 여수와 27일에 순천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 좌우익간의 대립 혼란 무질서로 수많은 경창, 군인,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국전쟁.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민족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을 뿐 아니라 한국 교히에도 그 피해가 실로 엄청났다. 260여명의 목사, 장로 교인들이 순교를 당했고, 60여명의 목사가 납북을 당했고, 예배당 267동이 소실되고, 705동이 파괴되었다. 순천노회에서도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순교를 당했다

순천지역은 1890년대부터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교회가 부흥하여 복음화 비율이 34.3%에 이르고 있다. 현재 천주교, 예수교장로회(통합), 예수교장로회(합동), 예수교장로회(고신), 기독교장로회, 기독교성결회, 기독교한국침례회등 여러 교단 소속 교회들이 복음화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00년 넘게 이어지는 한국 사랑의 가문이 있다.

첫째는 언더우드 가문이고, 두번째는 린튼 가문이다. 4대째에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시고 계신다. 특히 유진벨 재단은 현재에도 북한의 결핵 퇴치 사업등 북한 선교에도 힘쓰고 있다.

호남지역 선교의 개척자인 유진 벨 가문에 대한 소개가 자세히 되어 있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대표적인 선교사로 벌써 4대째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문가이다.

1대 유진 벨 목사(1868~1925)는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95년에 한국에 오셨다.

" 이 백성에게는 복음 외에는 결코 다른 희망이 없구나" 판단하고 기독교 복음으로 희망이 되고자 나주와 목포, 광주에 선교부를 세우고 복음 전파와 교육사업, 병원을 세우는 일에 큰 공헌을 하셨다.

목포에 영흥학교 정명학교, 광주에 숭일학교 수피아 여고 등을 세우셨다.

2대 윌리암 린톤 목사님은 1922년 유진 벨 목사의 딸 샬롯트와 결혼을 했다.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지내다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가 폐교되고 이후에 현 한남대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의 선구자가 되셨다.

3대 휴 린턴 목사님은 검정 고무신을 늘 신고 다녀서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라고 불리셨다.

순천에 기독진료소, 결핵 요양소등을 세우셨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순천 결핵요양소 앞 묘지에 묻히셨다고 한다.

4대 존 린턴 (인요한 목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타 소장님이시다.

아버지 존 린턴의 교통사고 사망으로 한국의 응급구조 체계에 관심을 갖고 일반 승합차를 앰블런스로 개조하여 순천 소방서에 기증함으로 한국 119 구급대의 효시가 되었다고 하신다. 한국형 구급차는 응급의료체계를 혁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휴 린턴의 5자녀들은 어머니 로이스 린턴과 함께 '유진 벨 100주년 재단'과 함께 북한에 식량 원조 사업과 결핵 퇴치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기도 하셨다.  지금도 유진벨재단에서는 북한 의료기관 70곳에서 25만여명의 결핵 환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초기 선교사의 어려운 생활상도 이해가 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 '물'을 가져 오라고 해야 할 것은 '말'을 가져오라고 해서 말(Horse)을 집으로 데려 왔다는 이야기 이다. 충분히 실 수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순천으로 부름 받은 선교사 1892년부터 1986년까지 450명이 선교사 가운데 순천지역에는 79명의 선교사가 사역하셨단다.

전체 선교사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마치 생명책에 기록 된 것 처럼 너무나 자랑스러운 이름들이다.

하늘에서 해 같이 빛날 이름들이다.

선교사님들은 천지를 아름답게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셔서 일까? 어떻게 식물 도감을 만드실 생각을 하셨을까?

사진 보다 더 정밀하게 정말 잘 그려 놓으셨다. 1913년 순천선교부에 부임해 44년간 한국선교에 몸바친 플로렌스 선교사님의 "한국의 들꽃과 전설"이라는 식물 도감이 한국 최초의 야생화 도감이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 100년 성지인 순천시 매산동의 기독교와 교육과 의료의 3박자가 이덯게 변화 발전 되어 왔는지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당시 선교사님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국 선교사로 일하도록 보내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하 하셨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 훌륭하고 귀하신 선교사님을 우리 조선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1960년에 로이스린튼 선교사가 결핵환자 방문 사역을 시작으로 2017년 안력산병원 격리병동을 순천시 도시 재생사업으로 복원한 것 까지 연대별로 기록되어 있다.

1966년에 애양원 나환자 이동 진료가 시작, 1976년 애양원 도성마을 건설, 1992년 우리나라 최초 구급차 1호 개발(인요한박사)

1997년 유진벨 재단 북한 결핵퇴치 지원사업, 2004년 매산등 선교사 근대 건축물 국가 등록 문화유산 지정을 되었다.

현대의 좋은 역사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VR로도 매산동을 체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나보다. 우리를 체험해 보지 못했다.

김제에 있는 ㄱ자 교회의 모형.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의 창의적인 예배 모습이다.

당시 선교사님들이 배우시던 한국어 교본 책자와 낱말카드들이 있다. (단어장 같은 것인가 보다) 영어와 한문과 한글로 적혀 있다.

당신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한자를 알아야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였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사용하시던 주방 기구들도 아래에 보인다.

1530 장로님들 모두 선교사 되시려고 열심히 들으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너무진지하게 잘 들으시내요.

1929년 프레스턴 선ㄱ사가 그린 매산동 마을의 약도라고 한다.

의료구역, 주거구역, 교육구역, 교회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호남 기독교의 성지이다. 

선교사님들은 복음만을 전한 것이 아니다. 가난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선진 기술도 가르쳐 주셨다.

애양원 장앤인 재활직업보도소 석조 교사 1954년 보이열 애양원장이 선교부 초기 건물을 활용해 건축한 후 1962년 인애자 선교사가 순천 대홍수 때 임시 결핵진료소로 사용했다. 1974년 토플선교사가 애양원 원장으로 있을 때 전남 동부지역 최초로 장애인 직업 학교를 운영했다.

애양원 장애인 직업교육이 활성화 되면서 1985년에 새롭게 건축한 재활직업보도소 선물이다. 당시 교육생들에게 무료교육, 기숙사 제공, 취업알선, 심리상담, 생활 교육이 제공되었다. 종럽생 가운데 66.7%가 취업에 성공하였고, 17.8%가 개업을 했다고 한다.

지금 시대에 비추어 보아도 탁월한 환경과 제도였던 것 같다.

더함 선교사 가옥이라고 합니다. (구, 크레이 선교사님 사용)

순천 옥천에서 나는 화강암(호랑이석)으로 외벽을 쌓고 한식 기와를 얹은 한양 절충식 건물이다.

흙벽돌에 초가지붕을 하던 시절에 이런 건축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 건축에도 선교사의 영향력은 지대 했을 것 같다.

뒤에 보이는 큰 소나무를 식목일에 기념 식수로 심었다고 합니다.

뒤쪽에 보이는 아람들이 소나무를 알고 있다는 분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매실나무이다. 줄기가 꼬불고불 한 것이 참 특이하다. 이 매실 나무 아래로 지나가면 처녀 총각들은 부부의 연이 맺어지고,

부부가 함께 지나가면 100년 동안 무병장수 한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1530 장로님들 부부가 매실나무 아래로 지나갔다. 모두들 100세까지는 건강하게 잘 사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부부도 함께 매실나무 아래를 지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삽시다.

유서깊은 선교 역사의 바로 그 현장에서 단체 사진을 한장 남깁니다. 1530장로님들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역사는 과거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앞으로 우리의 밝은 미래를 여는 중요한 열쇠이므로 역사 박물관은 언제나 방문해 볼 가치가 있다. 

순천 기독교 역사 박물관 앞에서 전체 단체 사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