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영원한 말씀이신 어린 양 (요1:1~4) 2025.03.11
다이나마이트2
2025. 3. 11. 22:46
2025 특새[2] 영원한 말씀이신 어린 양 (요1:1~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다른 세계의 복음서와 다른 관점이 발견됩니다.
①먼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예수님의 일대기를 시간 순서대로 기록한 성경이라면,
②[요한복음]은 시간적 흐름보다는, 신학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특별히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헬라 문화권을 대상으로,
“예수님을 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배경은 1세기 팔레스타인만이 아니고, 영원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문화에 익숙한 [요한]이 영원한 우주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후에 밧모 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한 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우주적 차원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첫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말씀이다.”라는 것입니다.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요1: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시작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로 선포로 시작하듯이,
[요한복음]도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라는 [선포]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태초]라는 단어는 시간적으로, “첫 번째 시점”이라는 것이 아니고,
①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②시간 너머에, 곧 [영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 영원의 상태이므로, “이 말씀은 곧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생겨났고”라고 말씀하지 않고, “말씀이 그냥 계셨다.”고 표현한 것은
“이 말씀이 어떤 시작된 기원이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창세 이전에 존재하신 분이며, 또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되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오시기 전, 천지만물이 생겨나기 전, 이미 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는 단어인데, 당시 헬라 세계의 중심 개념으로서,
”만물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이성이 있다.“고 그들은 믿었으니,
”로고스“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설명입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분명히 만물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원리가 없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과학적 또 철학적 탐구로도 이 세상이 그저 아무렇게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했던 겁니다.
그 로고스라는 단어로 예수님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
[요한]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 통해, ”로고스 개념“에 머물 수 없는,
그보다 더 뛰어나신 탁월하신 높으신 분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 시대에는 [로고스]가 만물의 질서를 부여하는 절대 이성이지만,
”말씀하시며, 임재하시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은 ”①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②인격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③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문자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므로,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라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절에, ”그 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01:02)고 했어요.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는 헬라어 [메타]라는 단어인데, 우리가 [메타버스]라는 것은 ”무엇을 따라서“,
또한 ”곁에 있다.”는 의미이고, “서로가 친밀한 관계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말씀은 “그 말씀의 위격을 설명하고,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께서 그 아들 안에 계시며,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는 임재하시는 분으로,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요 01:3)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말씀]이 피조 세계를 향해 오신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가 그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태초]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에도 나오는데,
①[창세기의 태초]는 ”옛 창조의 이야기“이고,
②[요한복음의 태초]는 ”새 창조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창조]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초]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옛 창조와 새 창조의 주인공이심“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어린 양,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고,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구속하시기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함께 찬양하고, 다음에 같은 본문으로, 박종길 목사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우리 이재훈 목사님의 설교 듣다보니, 은혜 받아서 ”제가 뭘 설교해야 되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파트를 제가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특별히 [요한]은 14절에서,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요 01:14)
여기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라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것이고, 그분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죽은 사람도 살리고,
[그 말씀]으로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두 번째 모습은 “영원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요한]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4절 말씀에,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 01:04)
그러니까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님은 또한 영원한 생명입니다.”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고, 그리고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되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던 일들을 소개하면,
①심지어 죽은 지 사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려주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②또 예수님이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고,
③보지 못하는 소경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고,
④12년 동안 혈류 병을 앓던 여인이 옷자락을 만졌을 때, 혈류의 근원을 끊어서 고쳐 주었고,
⑤또 38년이나 신음하여 베데스타 연못에 누워 있었던 병자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⑥많은 재산도 소유했지만, 가장 외로웠던 [삭개오]도 찾아가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받는다.”는 것은
식물에게 접붙임 하는 것과 같이, “주님에게 덧붙이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께 접붙임 받아,
우리가 주님이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생명이기에,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01: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그분에게 접붙인 바 받은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소유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을 [영접]하고,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접붙임]을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되니까,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이해하고, 내가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함께해야 가능해 집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①우리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야 되고,
②우리가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시고, ③[듣지 못하는 귀]가 열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번, 40일 새벽기도를 드리는 동안에, ”성령님이 내 닫힌 [마음의 문]이 열어지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눈]이 열리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귀]가 듣게 해 달라.”고 강구해야 될 것입니다.
[생명의 특징]은 자라나는 것인데, 성장하고 자라면, 열매를 맺고, 변화가 나타납니다.
생명이 잉태되면, 자라게 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변화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내가 소유하면,
우리에게도 변화가 나타나길 원해야 그게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의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①우리는 자라게 되어 성장하게 되고, ②변화가 나타나서, ③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에게 [성령의 열매]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내 자신을 돌아다 봐야 합니다.
내 신앙이 자라가지 않고, 변화가 없다면, 결국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그럴 때는 “성령님, 저를 돌보아 주시고, 내 마음을 열어주옵소서,
내 눈을 열어주시고, 내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내가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아, 나에게 새 생명이 싹트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쫓아내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좋아하는데,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어둠]을 쫓아가고, 어둠의 세력은 [사탄]입니다.
사탄 안에는 구원이 없고, 소망이 없고,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 영원한 생명을 통해 우리가 변화되고,
그리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