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요20:24-29) 2022.12.16
다이나마이트2
2022. 12. 17. 23:19
40일 새벽기도[5]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요20:24-29)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예수님께서 유일한 [길]이 되심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는 말씀에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의심]에 대한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일지라도 마음속에 있는 [의심]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심의 문제]는 우리가 ”불신하느냐?“ 아니면 ”확신하는가?“를 결정짓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의심하는 것, “그 자체를 [죄]”라고 여기고, 오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오스키니스]라는 기독교 철학자께서 세 가지 분명한 오해를 지적했습니다.
①첫째 의심은/ “모두 불신이기에, 잘못된 것이다.”라는 오해이고,
②둘째 의심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오해이고,
③세 번째 의심은/ 가지고 믿으려고 하는 것은 정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구원에 이르게 될 때에, 자신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 내가 진짜 구원을 받았네!”라고 놀라는 거예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런 질문조차 없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나?”라는 질문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사람조차도 아침 안개처럼 의심이 찾아오고, 또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런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니고, “의심 자체가 불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핵심]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서, “확신으로 변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라는 사람이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마를 대해주시는 태도를 보면, 나쁜 사람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개인적으로 찾아오신 사람이 4사람이 나옵니다.
①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여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고,
②예수님의 형제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③세 번째로 의심이 있었던 [도마]에게 나타나 주셨고,
④그리고 수재자이지만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이 네 가지 케이스 모두가 다 사연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그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확신시켜주셨고, 그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도마]는 충성스러운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매우 불신하고, 의심하는 제자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그 상처를 보지 않는 한, “나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해 초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을 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질문하는 [도마]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에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 또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신앙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신에 이르는 중요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이 없는 사람”이 어쩌면 “믿음이 없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마]는 아주 충성스러웠고, 동시에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기를 원했던 거예요.
▶이것은 무엇입니까?
[도마]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이 불신으로 향하지 않고, “[확신]으로 향하는 질문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불신과 확신 사이에“ 있어서, 불신으로 갈 수도 있고 확신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①[의심]이 불신으로 향하게 되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되지만,
②[의심]이 확신으로 가게 되면, 정말로 큰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 첫 번째의 조건은 정직한 질문이어야 합니다. 자기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들의 가진 질문을 자신의 질문처럼 던져봐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던데 “라는 그런 질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진짜 일어나는 정직하고 솔직한 질문이어야 합니다.
(2) 두 번째 조건은 ”그 의심이 [증거]를 놓고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의심에 대답을 주는 증거들이 역사 속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고, 말씀 속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삶 속에 그 증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있다고 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 증거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것은 ”정직한 의심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정직하고 솔직한 의심이었다면, 반드시 증거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증거를 살피고, 증거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로 남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계시]를 주지 않고, 역사상에 많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게십니다.
(3)세 번째로 그 증거를 찾았다면,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 증거에 자신을 내던져서 모험의 도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이 적용되어서, 그 모험을 시작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영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수영 선생님이 ”힘을 빼라.“고 하는 말은 “부력의 힘을 믿고, 힘을 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몸을 물에 맡겨야, 그 다음에 몸이 물에 뜬다.‘는 말입니다.
결국에 물에 자신을 띄우지 못하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이고,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부력을 믿고, 자신의 몸을 내 던져야”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고, 맡겨야 하는데”, 자신의 힘으로 수영을 하려면, 더 물속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자전거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패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갑니다.
패달을 돌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자전거는 넘어집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체험]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①정직한 의심을 해야 하고, ②증거를 살펴야 하며, ③그리고 결국 모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도마]에게 있었던 ”의심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의심“이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도마]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26절에서 27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들어와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라.“(요 20-26-27)
▶제자들이 왜, 문을 닫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잡혀 갈까,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 옆구리에 넣어, 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몸]에 ”십자가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는 거죠.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셨는데, ”십자가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확신]이 무엇입니까
[확신]은 때로는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 자체가 증거가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에서 확신으로 가려면,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 믿음 자체가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했어요. 이 말씀은 때로 증거가 있어서 믿지만, 증거가 없을 때에도 “우리 자신의 믿음 자체가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 자체가 증거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도마]는 ”내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봐야 한다.“는 믿음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으로 순교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