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5. 골고다의 십자가 (요19:14-22) 2019.4.19
골고다의 십자가 (요19:14-2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수님이 십자가로 넘겨질 때 마다, 인간들의 죄악이 있었어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유대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졌고,
[십자가 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차원”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스스로 자원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보면서, 예수님을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린 순종하는 마음과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자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힘없는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극형에 처해진 모습으로 비춰 집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숨을 거둘 때까지 드라마와 같은
극적인 장면들이 많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 의미 있는 장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여러분도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면으로 돌파 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억지로 받아들이거나, 할 수 없이 당하며,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즐겁게, 받아 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목숨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랬을까요?
그것은 양떼(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상에서 벌린 예수님의 <구원 드라마>의 시작입니다.
우리들도 다가오는 어려운 <고난사건>을 <구원사건>으로 바꾸세요.
사업에 실패하여 부도가 나도,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병이 들어도,
그것을 <구원사건>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입니다.
유대인과 제사장들은 진실을 거짓으로 포장하여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이런 십자가형의 언도에 복음서에서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 형]이 집행되는 과정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에게 쏟아지는 모욕과 조롱들이 ”아이러니 하게“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는 어떤 뜻인가요?
본래의 의도는 그런 뜻이 아닌데, 실제로 다르게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 조롱과 모욕이 사실로, “그랬다는 것”이 보여 집니다.
그 첫 번째 아이러니는 십자가에서 처형할 죄수를 다시 관저로 데리고 들어가서,
다시 심문하고, 붉은 까운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경배하는 것 같지만, 더 비참하게 희롱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때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빌라도는 예수의 처형에 대하여 가슴이 아팠으나, 어째든 외부의 힘에 의해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적혀있는 <팻말>을 보십시오.
예수의 머리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죄목을 써서 붙여 놓았으나,
그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 말이 싫어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No"라고 거부하면서, 나는 "할 도리를 다 했다"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빌라도총독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확인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처형사건>의 팻말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예수님의 위상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해서 쓴 것이 아니고, 더 큰 모욕을 주기 위해, 그렇게 쓴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것이 “유대인의 왕”의 종말이고, 누구든지 로마에 반역하면,
이런 모욕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그렇게 쓴 것입니다.
2. 두 번째 아이러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서 조롱하는 모습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남을 구원한다.”고 하더니, “정작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합니다.
이렇게 조롱 받았던 예수님은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는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 십자가형을 참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실제 사건]이 되셨어요.
그런 조롱과 핍박을 인내하면서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가정하면,
결코 [십자가]가 우리들을 구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몸을 [대속 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무지한 유대 지도자“들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3. 세 번째 아이러니는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3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당장 구원하시겠지,
자기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었다."(마 27:43)
46절 말씀에, ”오후 3시쯤, 예수께서 큰 소리로“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며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마 27:46)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를 하였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였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믿고, 절규하면서, [십자가]를 받아드렸습니다,
여기서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은 한탄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버릴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시느냐?”는 절규입니다.
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 때,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로 신뢰하며,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버림을 받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셨어요.
이런 “십자가의 아이러니“는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발자취를 따라 오도록, 만들었어요.
우리들은 내 문제가 잘 처리되면, 그 때는 ”나의 하나님“을 찾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나의 하나님“을 잠시 잊고 살거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이 역전되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지만,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낙심하게 됩니다.
이런 조롱과 모욕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메시아 이다”는 것을 증거 하게 됩니다.
결국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듯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발자취”와 “십자가의 흔적”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정리 : 천영무 장로님 사진 김종호